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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에서 성스러운 계곡 투어버스를 탔다. 성스러운 계곡은 쿠스코와 마추픽추 사이 안데스 산맥 골짜기에 있는 계곡으로 께추아어로 우루밤바(Urubamba)라고 부른다. 우루밤바 강 주변으로 잉카의 유적들과 인디오 촌락들이 형성되어 있다.
투어는 친체로(Chinchero)-모라이(Moray)-살리나스 마라스(Salinas de Maras)-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를 거쳐 피삭(Pisac) 마을을 지나 쿠스코로 돌아오는 하루 일정이다. 나는 이중 오얀따이땀보까지만 함께 가고 오얀따이땀보에서 4시 36분에 떠나는 잉카레일 기차를 탈 예정이다.
어제 오후 아르마스 광장에서 투어를 예약할 때만 해도 당연히 영어가 지원되는 가이드 투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객 14명 중 나만 빼고 모두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나만 혼자 소외된 느낌이다. 가이드가 나에게 물어보길래 나는 영어 통역이 필요하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나만을 위한 영어 가이드가 제대로 될 리 없다. 대부분은 스페인어로 하고 꼭 필요한 말만 영어로 해준다. 오늘의 일정이나 요금 같은 것 말이다. 갑자기 버스를 잘못 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후 4시까지 버텨야 한단 말인가. 낯선 스페인어에 둘러싸여서?
처음 내린 곳은 친체로가 아니라 친체로 가는 길목의 상점이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상점으로 데리고 갔다. 패키지 투어는 어느 나라나 똑같나 보다. 머리를 양갈래로 길게 땋고 둥근 테가 달린 중산모자를 쓴 원주민 여성이 설명을 해주고 사람들은 웃으며 듣는다. 나만 못 알아 듣는다. 다행히 가이드가 내 뒤로 오더니 나만을 위해 영어 통역을 해준다.
“저건 내츄럴 소금을 만드는 거예요.”
“알파카 털로 실을 짜내는 과정이에요.”
“나무로는 악기도 만들지요.”
그렇게 쇼가 끝나고 이제 지갑을 열 시간이다. 나는 머그컵과 코카차를 담는 잔을 하나 샀다. 가격은 둘이 합쳐 30솔(9600원). 잔에는 잉카제국보다 더 오래된 옛날 정취가 묻어나고, 머그컵에는 정성이 가득하다(나중에 집에 와서 뜯어 보니 잔은 깨져 있었다ㅠ).
다시 버스를 타고 갔다. 계곡 사이로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고, 버스는 알파카 무리를 만나 서행하기도 한다. 버스 바퀴가 지나간 자리엔 먼지가 흩날린다. 다행히 날씨는 맑다. 구름은 드문드문 떠 있지만 어제처럼 비가 쏟아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친체로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나를 의식해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땐 스페인어로 설명을 하고 이동할 땐 영어로 말해주었다. 나는 가이드 옆에 딱 붙어 다녔다.
친체로
친체로는 동굴을 개조해 만든 절, 성당 등이 있는 유적지다. 1400년대 발견된 친체로는 돌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다. 반달 모양의 돌이 신기해 사진을 찍었다.
맞은 편에는 거대한 층계식 밭이 있다. 층계식으로 만든 이유는 기온에 따라 다른 작물을 재배하기 위함이란다. 탁트인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가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인디오들이 손수 짠 직물과 각종 공예품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말린 옥수수와 감자도 판다. 옥수수는 밍밍하지만 먹을 만하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 소녀가 자기가 만든 펜과 라마 열쇠고리를 들고 끈질기게 쫓아오길래 열쇠고리를 2솔에 사주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두 명이 합류했다. 비어있던 버스 내 두 자리가 비로소 채워졌다.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중국인 커플이다. 어쨌든 이들 덕분에 가이드에겐 영어의 필요성이 늘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방인 같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는 가이드가 더 많은 영어를 들려줄 것이다. 남미 사람들과도 어느새 눈짓으로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난 이 가이드 투어를 즐기고 있다.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렸다.
모라이
다음에 찾아간 곳은 둥근 원 형태로 이루어진 농작물 경작지인 모라이다. 수로를 갖춘 계단식이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라는 별명도 있다.
모라이는 께추아어로 8월이라는 뜻이다. 8월에 씨를 뿌리면 생산성이 풍부해지기 때문에 이를 중요하게 기념하는 의미의 작명이란다.
모라이를 떠나 또 상점에 들렸다. 나는 소금 두 봉지(15솔)와 소금이 들어간 초콜릿을 샀다. 소금을 파는 것을 보니 살리나스 마라스 염전이 멀지 않았나 보다.
살리나스 마라스는 신비로운 곳이다. 산새 험한 곳에 근사한 모양으로 조성된 염전이 펼쳐져 있다. 수로에 물이 졸졸 흐르길래 만져보니 소금물이다. 손에 묻은 물이 금세 소금가루로 변해버린다.
살리나스 마라스
우루밤바의 뷔페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퀴노아를 비롯해 처음 보는 음식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식당에서 나는 밥을 혼자 먹었다. 중국인 커플은 식당 예약을 안 했는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음식은 두 접시나 싹 비울 정도로 맛있었다.
오얀따이땀보
이제 나의 성스러운 계곡 투어의 마지막 종착지 오얀따이땀보로 갈 차례다. 오얀따이땀보에서 오얀따이는 파차쿠텍왕 시대의 장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이곳으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은 수차례에 걸쳐 오얀따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사랑을 인정했다. 왕도 어쩔 수 없었을만큼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잉카제국 최후의 황제 망코 잉카 유팡키(Manco Inca Yupanqui, 1516~1544)도 바로 이곳에서 스페인에 대항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는 이곳의 첫 인상은 압도적이다.
오얀따이땀보 계단 맨위에 서면 우루밤바 강 상류인 빌카노 강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강은 아마존 강으로 이어진다. 또 이곳에는 정복자들도 파괴하지 못한 ‘태양의 거울’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거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얀따이땀보부터 시작해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 마추픽추(Machu Picchu)로 올라갈수록 잉카의 도시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만들어진 수로는 몇 백년이 지난 지금도 골목골목을 흐른다.
오얀따이땀보 꼭대기에 올라 사진 찍고 있는데 한국 여자가 계속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셀카 저 정도 찍으면 가히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경지에 오른 솜씨가 감탄스러웠다. 골목처럼 생긴 벽돌길에서 우연히 그 여자와 마주쳤다. “저쪽으로 가면 아까 돌아가는 그 길이죠?”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네”라고 답했다.
아마도 한국인 전문인 파비앙 여행사를 통해 온 여자인 듯한데 나를 투어 일행으로 착각했나보다. 굳이 설명하기 귀찮아서 별다른 말 없이 그냥 내려왔다.
한국인 투어가 파비앙 투어라면 우리 투어의 이름은 루나 투어다. 루나 투어 가이드는 나를 오얀따이땀보에 내려주고는 걸어가라고 했다. 기차역까지 데려다 줄줄 알았는데 가이드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면 기차역이 나올 거라고 말하고는 가볍게 허그를 해준 뒤 버스에 올라타 사라졌다. 이로써 루나 투어 그룹과는 이별이다.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이런 곳에 기차역이 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떤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이 길이 맞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따라오라고까지 한다. 기차는 4시 36분에 떠나니 아직 1시간 30분이나 시간이 있어서 늦을 걱정은 안 했다. 그래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계속 걷다보니 무심하게 떠나버린 투어버스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나타난 기차역. 직선으로 걸어온 길 끝에 페루레일과 잉카레일 사무실과 플랫폼이 있다. 햇볕이 따가워서 근처 카페에 들러 카푸치노를 한 잔 주문했다. 6솔. 커피를 마시면서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 일주일간 페루 (3) 성스러운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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