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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달이 세 개 떠오른 밤

영화&TV 2012/05/13 02:23






라스 폰 트리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안티크라이스트>에 이어 이번엔 우울함의 극단으로 치닫는 <멜랑콜리아>다. 라스 폰 트리에는 2007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했었다. 작년 깐느 영화제에서 나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도 정신적인 기복이 심했던 탓이라는데, 그가 최근에 선보이고 있는 작품은 분명히 이전의 작품들과 많이 다르다.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과 비교하면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는 전혀 다른 감독의 영화처럼 느껴진다. 사회 속에서 차별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을 내세워 그들을 통해 부조리를 신랄하게 풍자해왔던 스토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최근 두 작품에서는 외딴 곳에서 사회와 단절된 소수의 인물군과 극단적인 냉소만이 남았다. '도그마 선언'을 할 정도로 날것 그대로의 영상을 추구하던 그의 스타일마저 완전히 변해서 이젠 극단적인 고속촬영이나 특수효과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정서적인 느낌과 미술을 차용한 이미지를 통해서만 라스 폰 트리에의 예전 작품들과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멜랑콜리아>를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 키워드다. '우울증' 그리고 '종말.' 라스 폰 트리에는 "우울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재앙이 닥칠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로 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설명했는데 아마도 감독 자신이 겪고 있는 질병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으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영상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종말'이라는 단어는 참 무책임한 단어지만 이미 <안티크라이스트>로 인간 내면의 극단을 실험해본 감독에게 지구의 종말은 그저 또하나의 실험 대상이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달라진 자신만의 방식으로 종말에 대처하는 인간의 내면을 영화 속에 담고 있다.


내러티브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를 '소설'로 비유한다면 <멜랑콜리아>는 소설보다는 '시'에 더 가까운 영화다. 이야기들을 엮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기보다는 어떤 관념들이 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시를 보는 듯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저스틴과 클레어는 우울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둘러싸여 있다.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클레어의 아들 리오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그 역시 두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이 영화에는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대위법을 처음 사용한 곡인데 줄거리를 위주로하던 기존 오페라의 관행을 깨고 인간의 내면심리를 파고들었던 작품이다. 앞서 '시'라고 표현했던 이 영화의 상징성과 비슷해서 잘 어울린다. 그림으로는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 등의 작품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혹은 영화의 주인공인 저스틴을 통해 재현되기도 한다. <도그빌>에도 등장한 적 있던 [오필리아]의 이미지는 상실감에 빠진 저스틴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와중에 빈 손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냥꾼을 그린 브뤼겔의 그림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잿더미로 타버리는데, 사회와 고립되어 있는 이 영화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또 골리앗 머리를 칼로 베어내 들고 있는 다비드의 그림은 저스틴이 결혼식에서 만난 직장 상사처럼 스트레스를 주는 주변인물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음악과 미술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


영화는 1,2부로 나뉘어 두 자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부 [저스틴]은 성대하고 부유한 결혼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해서 불안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저스틴의 이야기다. 결혼식은 풍요로운 파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사롭지 않은 가족의 면모가 드러난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는 엄마, 숟가락 하나라도 챙겨가려는 아빠, 이런 가족들을 비난하면서 결혼식 비용이 얼마나 비싼지를 투덜대는 형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는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의 비밀은 2부를 위해 감추어져 있다. 직장 상사인 잭은 결혼식에서마저 끊임없이 광고카피를 내놓으라며 저스틴을 괴롭힌다. 밖으로 나간 저스틴은 하늘을 바라본다. 한눈에 보기에도 특이한 빨간색 별이 떠 있다.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은 마치 병풍처럼 저스틴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데, 18홀의 골프 코스까지 갖춘 대저택에서 저스틴은 마치 외딴 섬처럼 느껴진다. 결국 결혼식이 끝나면서 남편이 될 마이클도 떠나버린다.


1부는 행성 충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브뤼겔이 사냥꾼의 초라함을 강조하기 위해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익살스럽게 그린 것처럼 2부를 위해 꼭 필요한 사전 설명으로 존재한다.


2부 [클레어]는 동생 저스틴을 돌보다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행성을 보고 공포에 빠진 클레어의 이야기다. 1부와 달리 클레어와 남편 존, 아들 리오, 저스틴, 그리고 집사 외에 다른 등장인물이 없다. 본격적으로 사냥꾼 이야기로 들어선 것이다. 따뜻한 금빛 톤이었던 1부와 달리 2부는 차가운 청백색이다. 지금까지 지구 종말을 다룬 영화들은 으레 들뜬 리포터로 상징되는 미디어의 수다와 탐욕스런 사회의 혼돈이 주된 이야깃거리가 되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1부에서 이미 사회적 배경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에 오로지 인물만이 남았다.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가 무대 세트를 단순화시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춘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어떤 미디어와도 접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딱 한 번, 클레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멜랑콜리아 행성의 '죽음의 춤'이라는 경로를 알아냈을 뿐이다. 이들에게 행성 충돌은 국가나 사회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자신이 파멸하게 되는 실존적인 공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저스틴이 1부에서 극도의 우울증세를 통해 정신 파괴를 겪은 후 담담하게 마지막을 기다릴 침착함과 냉정함을 갖게 되었다면 클레어와 존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존은 과학자들의 연구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클레어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은 지구보다 훨씬 크다.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음을 알게 된 클레어와 저스틴, 리오는 나뭇가지로 만든 동굴에 앉아 지구의 마지막 날을 기다린다. 리오가 스틸브레이커라 부르는 이모 저스틴과 함께 만든 매직 동굴이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 차분한 저스틴과 겁에 질린 클레어의 상반된 표정에 종말을 마주하는 서로 다른 모습이 보인다.


여러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은유로 가득한 영화지만 마지막은 직설적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돌아가는 법이 없다. 인상적인 시를 한 편 읽은 듯, 이미지가 머리 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영화가 끝나면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저스틴의 머리 위로 비가 되어 떨어지는 새, 세 사람 위에 떠오른 세 개의 달, 숲속을 뛰어가다 나무줄기에 걸린 신부, 주저앉는 말, 아이를 안고 골프장을 빠져나가는 클레어, 나무를 깍는 소년, 충돌하는 두 행성... 고속촬영을 통해 극단적인 슬로모션으로 만들어져 마치 미술작품을 나열해 놓은 것처럼 구성되었는데, 결국 이 영화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다 들어 있다.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멋진 오프닝시퀀스다. 특히 슬로모션이 주는 긴장감은 탁월하다.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에서 보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슬로모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저스틴과 클레어 자매는 커스틴 던스트와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연기하고 있다. 특히 커스틴 던스트의 새로운 이미지 변신이 놀라운데 시종일관 불안 속에 갇혀 있다가 나중엔 한밤중에 풀밭에 나체로 누워 푸른 행성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는 강렬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깐느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이 아깝지 않다.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안티크라이스트>에 이어 또 한번 쉽지 않은 역할을 맡았다. 전작에서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힌 여전사 같은 캐릭터였다면 이번에는 불안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모성본능에 몸부림치는 역할이다. 하지만 전작의 캐릭터가 워낙 무시무시했던 탓인지 이번에는 무난하게까지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였을 장면인 '멜랑콜리아' 행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의 몇 배 크기인 이 행성이 다가오는 장면의 원근감은 관객을 압도한다. 리오가 만든 원형 철망 너머로 점점 작아지거나 커지는 행성은 짙푸른 지구와 구별되는 탁한 푸른색으로 저스틴과 클레어의 우울함을 상징한다. 여기에 둥둥거리는 공포스런 음향과 바그너 음악의 차가움이 더해져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충돌은 관객에게 강한 여운을 남긴다. 모든 것의 종말은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아름다운 영상에 할 말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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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아무도 몰랐던 로맨스

영화&TV 2012/05/12 14:48




이 영화의 제목은 마치 스타 다큐멘터리의 제목 같다. 한국식이라면 <김태희와의 3일> 뭐 이런 식일까. 사실 나는 마릴린 먼로 세대가 아니어서인지 그녀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 섹시스타라고는 하나 당시의 섹시란 지금에 비할 바가 못된다. 음악으로 치면 랩이 나오기 이전의 댄스 음악을 듣는 수준이랄까. 순수하고 클래시컬하다. 마릴린 먼로의 대표작인 <뜨거운 것이 좋아>나 <7년 만의 외출>을 지금 다시 보게 되면, 섹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도 대단한 스타였지만 약물남용으로 요절한 뒤에 오히려 더 스타가 됐다. 자살에 대해 끊임없이 의혹이 등장하고 당대의 대단한 남자들과의 스캔들에 오르내리면서 신비한 이미지는 더 증폭됐다. 스캔들에는 심지어 로버트 케네디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앤디 워홀 같은 아티스트가 그를 20세기의 아이콘으로 다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화는 1962년에 사망한 마릴린 먼로의 50주기가 되는 해에 맞춰서 만들어졌다. 원작은 1995년에 발간된 다큐멘터리 작가 콜린 클라크의 <The Prince, The Showgirl and Me>. 1956년 먼로가 영국에 머물며 영화 <왕자와 쇼걸>을 촬영할 당시, 로렌스 올리비에 프로덕션의 '고퍼'였던 콜린 클라크와 로맨틱한 일주일을 보낸 이야기다. 영화는 초반에 실제 이야기라는 자막으로 시작하지만 영화가 전적으로 콜린의 회고록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까지가 실화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도 몰랐던 로맨스인 만큼 아마도 본인들만이 사실을 알 것이다.


영화는 무척 고풍스럽다. 마치 그 당시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고증이 잘 되어 있다. 파인우드 스튜디오, 윈저 캐슬, 이튼 스쿨 등 영국적 느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장소들이 주요 배경이다. 당시 공산주의와 노조설립이 한창 이슈일 때의 사회적 배경도 등장인물들 간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히 훌륭하다. 마치 실제의 로렌스 올리비에와 마릴린 먼로를 보는 듯하다. 경이로운 영화들과 연극을 남긴 로렌스 올리비에는 역시 또한명의 영국 최고의 배우인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이나 후나 로렌스 올리비에 역을 맡을 배우로는 케네스 브래너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환상적인 조합이다. 마릴린 먼로 역은 미셸 윌리암스가 맡았는데 결과가 좋아서 지금은 최고의 캐스팅으로 칭송받지만 사실 이 영화 이전에 미셸 윌리암스라는 이름은 요절한 히스 레저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지금 제작중인 영화 <블론드>에서 마릴린 먼로를 연기할 나오미 와츠가 오히려 마릴린 먼로와 더 싱크로율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미셸 윌리암스는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콜린 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이다. 톰 칼린의 <세비지 그레이스>로 유명해진 그는 7살 연상의 슈퍼스타에게 마음을 빼앗긴 23세의 청년을 생동감 있게 연기했다. 이 영화의 플롯상 관객들은 그에게 감정이입되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다. 잘 생기진 않았지만, 당차면서도 여리고, 순박해 보이면서도 영리하다. 루시 역을 맡은 현재의 슈퍼스타 엠마 왓슨과 과거의 슈퍼스타 마릴린 먼로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이라니. 아마도 많은 남자들이 부러워할 것 같다.


영화는 로맨틱한 랑랑의 피아노 연주로 시작해서 미셸 윌리암스가 부르는 'That Old Black Magic'으로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적이다. 누구와도 쉽게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마릴린 먼로. 그리고 실제로 그녀와 사랑에 빠진 23세 청년. 어떻게 보면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영화 속 영화이기도 한데, 마릴린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도 불러일으켰으리라.


영화를 보고나니 한국에는 왜 이런 영화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위대한 배우에 관한 영화. 그리고 고풍스러운 멋이 살아있는 한국영화를 보고 싶다. 유산은 비단 전해져 내려오는 것 뿐만 아니라 후세에 어떻게 꾸미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유산'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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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멸망보고서, 좀비+로봇+혜성

영화&TV 2012/05/11 00:59







자타공인 혹은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야인이 동시에 예언해 유명해진 '지구 멸망의 해' 2012년을 맞아 임필성 감독과 김지운 감독이 함께 만든 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멋진 신세계> <천상의 피조물> <해피 버스데이>의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각각 좀비, 로봇, 그리고 혜성을 소재로 상상의 세계를 그린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년도는 무려 6년 전이다. <멋진 신세계>의 여주인공 고준희가 21세 신인 시절에 찍은 영화가 그녀가 스물여덟이 되는 해에 개봉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6년 전에 만들어두었다가 개봉을 못한 채 묵혀놓은 영화이다보니 영화의 만듦새가 요즘 영화들과 다르다. 뭔가 짜임새가 없고 스토리는 진부하고 특수효과도 어색해 보인다. 또 인류멸망을 제시하는 상상력도 그다지 새로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해탈한 로봇이랄지 당구공을 외계에서 주문했다든지 하는 몇몇 독특한 아이디어 정도만 사줄 만하다. 다분히 2012년을 의식해 개봉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다지 주목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첫번째와 세번째 영화가 임필성 감독의 영화이고 두번째 영화는 김지운 감독 영화다. 그런데 김 감독의 <천상의 피조물>은 임 감독의 영화들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임 감독 영화들이 인류가 멸망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데 반해 김 감독의 영화는 해탈한 로봇이 스스로 멈추는 데서 끝난다. 새로운 부처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인류멸망이라고 보고 한 제목 아래 묶은 듯한데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세 편이 하나의 영화로 묶이다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된다. 아이디어와 만듦새의 측면에서 보자면 개인적으로 <해피 버스데이>가 가장 좋았고 <멋진 신세계>가 가장 별로였다. <해피 버스데이>는 혜성충돌 카운트다운과 이에 대피하는 가족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재치있게 그리고 있는데 혜성이 사실 당구공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금 생각해도 기막히다.


<멋진 신세계>는 한창 떠들썩했던 광우병에서 비롯된 인류멸망을 그리고 있는데 미친 소고기를 먹은 주인공이 숙주가 되면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간다.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한 상상력이라고 느껴지지만 이 영화가 2008년 촛불시위가 있기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나리오였을 것으로 느껴지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참 산만해서 사회 모순을 말하고 싶은건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헛갈린다. 차라리 강풀의 웹툰 [당신의 모든 순간]처럼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다.


<천상의 피조물>은 로봇이 스스로 열반에 든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뼈대로 해서 등장인물을 만들고 이야기를 늘려나간 듯한 작품이다. 탁 트인 세트 덕분에 인물 클로즈업마저 시원스럽게 보이는 반면 대사가 너무 많다. 물론 대사가 많아도 하고 싶은 말을 우회적으로 하는 방식을 택하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그런 미덕을 모른다. 그저 로봇에게 "왜 아무 말도 못하냐"고 채근대는 식이다. 그리고 로봇은 마치 불경에나 나올 법한 말을 직접 한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불자들은 너무 티나게 감탄한다. 재미있는 소재이지만 좀더 함축적인 전개 방식을 찾았다면 더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대체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운 <인류멸망보고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화려한 캐스팅은 아주 놀랍다. 류승범, 고준희, 박해일, 김강우, 조윤희, 김규리, 송새벽, 류승수, 이영은, 배두나, 진지희, 그리고 봉준호까지.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임필성 감독이 까메오 출연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영화에 봉 감독을 직접 출연시킨 마성의 인맥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많은 바쁜 배우들의 연기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주는 몇 안되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나저나 올해 2012년 지구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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