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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에서 비행기가 연착됐다. 출발시각인 8시 55분이 됐는데도 게이트는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늘길이 막혀서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모든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다. 그런데 안내방송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모든 승객은 자신의 항공편이 변경되는 상황을 디스플레이에 가서 확인하라고? 지연된 거 알고 있는데 그거 확인하러 갔다가 앉아 있던 자리만 뺏겼다.


한국을 떠나온지 벌써 27시간째인데 아직 공항이다. 졸립다. 머리 감고 싶다. 옷 갈아입고 싶다. 이제 그만 가즈아…



10시 3분에야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버스를 타고 활주로를 지나면서 보니 LC Peru 항공기는 이거 한 대뿐이다. 가장 작은 항공사의 비행편을 예약했나보다. LAN이 가장 커보였다. 또 그만큼 비싸기도 했다. 어쨌든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옆자리에 시끄러운 커플이 앉았다. 창밖으로는 구름이 가득하다. 비행기에서 보는 구름은 멋지지만 땅으로 내려가면 구름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구름 사이로 깎아지른 듯한 녹색 산들이 보인다. 마추픽추마추픽추마추픽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쿠스코. 잉카 제국의 수도. 안데스 산맥 분지 해발 3399m에 위치한 도시. 잉카인들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쿠스코는 배꼽이라는 뜻이다. 그들에게 쿠스코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11세기 쿠스코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잉카는 15세기 초에는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잉카제국은 1572년 스페인에 의해 잔인하게 멸망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어서 잔인하다. 선택이 있고, 그 선택에 따라 역사가 바뀐다. 잉카도 그 전 정복자인 킬케족의 피를 밟고 세워진 제국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도덕적 가치는 무의미한 것인가.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잉카제국에 동정이 간다.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는 잉카의 왕을 몰래 납치해 살해했다. 정당하지 못하다.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일요일이라 환전소를 찾기 어려웠지만, 아르마스 광장 근처의 한 곳에서 겨우 환전을 하고 어느 블로거가 추천한 맛집을 찾아갔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식당인데 과연 어떨지 우려스러웠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샐러드, 수프, 소고기를 주문하고 코카차를 시켰다. 코카차는 고산병 증세를 낫게 해준다는 차다. 쿠스코에 도착하니 역시 머리가 너무 아프다. 고산병 증세가 이런 거구나. 코도 시큰거린다. 관광이고 뭐고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페루에 있는 동안 음식에서 실패한 기억이 없다. 그만큼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음식은 따로 묶어 포스팅하기로 한다. 첫 날은 고산병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호텔로 돌아와 일찍 잠들었다. 저녁때 폭우가 쏟아졌는데 덕분에 밖으로 나가지 않길 잘했다고 위안 삼으면서.


다음날 7시반쯤 일어났다. 밖은 벌써 환하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르마스 광장 성당에서 미사 지낼 때 나는 소리란다. 그 소리는 한밤중에도 들렸는데… 미사를 밤새 지내는 건가. 그렇다면 신앙심 하나는 끝내준다.



택시를 타고 샥사이와망(Saksaywaman)으로 갔다. 샥사이와망은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여라'는 뜻의 케추아어다. 쿠스코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입장료는 70솔로 샥사이와망을 비롯해 4개의 유적지에 입장할 수 있다. 샥사이와망 한 곳만의 입장권은 팔지 않는다. 한 마디로 관광상품 끼워팔기를 하는 것인데 성스러운 계곡도 그렇고 쿠스코 티켓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샥사이와망에서 내려다본 쿠스코


샥사이와망 바로 옆에는 크리스토 블랑코 예수상이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지만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은 똑같다. 그 옆에는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감흥이라기보다는 예수가 멀리 남미까지 와서 고생한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게 피사로 때문이다. 뭐, 피사로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유럽에서 찾아와 페루를 꿀꺽하긴 했겠지만.


크리스토 블랑코

크리스토 블랑코 옆 십자가 세 개


샥사이와망은 12세기에 잉카족 이전에 이 땅을 지배한 킬케족(9~12세기)이 세운 언덕의 요새다. 이후 잉카족(13~16세기)은 쿠스코를 퓨마의 형상으로, 이곳을 퓨마의 머리 형상으로 받아들였다. 잉카족은 세계가 하늘, 땅, 지하로 되어 있고, 그곳을 독수리, 퓨마, 뱀이 각각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곳을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잉카족을 학살하는 처형장으로 사용했다. 도시를 향해 두 팔을 뻗은 거대한 예수상은 용서를 비는 것인지 혹은 개종하고 내 품으로 오라는 것인지 의미를 잘 모르겠다.



택시도 없고 버스는 당연히 없어서 어떻게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내 앞에 섰다. 나는 아르마스 광장에 갈 거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면서 타라고 했다. 어, 내가 히치하이킹에 성공하는 건가. 처음엔 순진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고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해서야 그는 드디어 첫 마디를 내뱉었는데 그건 “디에스 솔”이라는 말이었다. 그게 10솔을 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나는 돈을 주긴 했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여긴 택시라는 표시가 없어도 그냥 택시 영업을 할 수 있나보다.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지들이 포진해 있다. 아르마스 광장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고, 모든 투어가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르마스 광장에는 대성당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코리칸차(Qoricancha)가 있다. 대성당은 당연히 카톨릭의 본산지이고, 코리칸차는 태양의 신전이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였고, 그 중심지가 바로 코리칸차다. 대성당과 코리칸차가 고작 1km 정도 사이에 마주보고 서 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코리칸차는 예전 잉카제국 시대의 모습보다는 태양과 달의 신전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성당이 들어서 있는 등 많이 변형되어 있다.


대성당


대성당에 들어갔더니 행사를 하고 있다. 무슨 행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예수회를 세운 로욜라 모형을 성당 내부에서 정성스럽게 들고 밖으로 꺼내온다. 곧바로 어딘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로욜라 모형을 내려놓더니 간식을 먹기 시작한다. 먹고 있는 것을 구경하기가 뻘쭘해져서 바로 코리칸차로 이동했다.


로욜라 모형을 내려놓고 간식을 먹는 사람들


코리칸차는 재설계된 곳이 많아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잘 이해하기 힘들다. 나도 20솔을 주고 가이드를 신청했다. 잉카의 신에게는 위계가 있어서 해와 달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별, 비, 무지개 등이고, 그 다음이 동물들이다. 이 모든 신들을 관장하는 크리에이터를 ‘위락쿠차’라고 부른다. 위락쿠차를 모시던 장소는 코리칸차에서 지금 아주 좁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물론 에스파냐인들이 위락쿠차를 구석으로 몰아낸 것이다.


코리칸차

잉카 신들의 위계

위락쿠차 신전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점심을 먹으러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앉자마자 주문도 안 했는데 스프가 나왔다. 스프를 먹고나니 닭고기 커리가 나왔다. 음료수도 나왔다. 전부 7솔(2200원)밖에 안 한다. 나와서 보니 내가 먹은 건 오늘의 메뉴였다. 로컬들은 다들 이걸 먹으러 오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가장 싼 식사였고 맛도 괜찮았다.


대성당이 창밖으로 보이는 스타벅스에서 페루에만 있다는 알가로비나(Algarrobina)를 그란데 사이즈로 주문하고 한동안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이곳 스타벅스는 작은 한국이다. 쿠스코에는 한국사람이 정말 많고 그들은 다들 스벅을 거쳐가는 모양이다.



어느새 비는 자취를 감추고 하늘에 태양이 나타난다. 이렇게 금세 맑아지니 어찌 태양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음악이 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오! 하늘의 주인, 위대하신 콘도르여.

나를 고향으로, 안데스산맥 위로 데려가요. 오! 위대하신 콘도르여.

잉카의 형제들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오! 위대하신 콘도르여.

쿠스코 광장에서 저를 기다려 주세요.

우리가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거닐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한 남자가 전통 민요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를 피리 같은 잉카의 '케나(Quena)'로 연주하고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그는 발로 드럼도 친다. 한동안 음악을 듣고 있으니 그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코레아에서 왔다고 하니 반갑게 웃는다. 나는 동전을 통 안에 집어넣고 그와 사진을 찍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쿠스코의 날이 저물고 있었다.


참고) 쿠스코 볼거리 25선 블로그: https://m.blog.naver.com/kimminsu6205/221129690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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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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