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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밖으로 계곡이 흐른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는 ‘따뜻한 물’이라는 뜻이지만 따뜻함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콸콸콸 흐른다. 물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설쳤다. 아침 일찍 호텔 밖으로 나가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퍼붓고 있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배낭과 카메라를 메고 그 위에 우비를 겹쳐 입고 6시 30분에 마추픽추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옆자리에는 콜롬비아에서 온 여자가 앉았는데 영어를 하나도 못한다. 1시간 동안 비오는 창밖만 바라보다가 드디어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했다.
우비를 입기 전 미리 프린트해간 입장권을 꺼냈다. 그런데 입구에서 여권 검사를 한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거다. 할 수 없이 우비를 다시 벗고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는 대공사를 치르고 나서야 마추픽추에 입장할 수 있었다. 몇 걸음 내딛자 마추픽추가 안개 속에서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Hiram Bingham, 1875~1956)이 1911년 7월 24일 발견하기 전까지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도시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km 지점에 있다. 해발 2208미터다. 이곳은 잉카제국과 잉카 문명을 상징하는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Machu Picchu)’와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Wayna Picchu)’로 이루어져 있다. 마추픽추 안에는 태양과 달의 신전, 신성한 광장과 바위, 천문 시계 ‘인투와타나(Intihuatana)’ 등이 있다.
관람객들이 마치 순례자들처럼 일렬로 마추픽추를 걷는다. 비가 와서 행여 미끄러지지 않을까 더 조심조심이다.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사실 그가 찾으려 했던 것은 전설의 황금도시 빌카밤바였다. 에스파니아가 잉카를 멸망시킬 때 마지막 황제 아마루가 엄청난 보물을 그가 숨어 살던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에 숨겨놓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수백년 간 누구도 보물은커녕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도 알지 못했다.
1909년 빙엄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아푸리막강 유역의 험한 밀림을 탐험하다가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궁전과 제의를 치르던 광장,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엔 빌카밤바를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문헌을 아무리 읽어봐도 빌카밤바와는 달랐다. 2년 후 이곳을 다시 찾은 빙엄은 만코 2세 황제가 탈출한 길을 더듬어 나가다가 산봉우리에 있는 폐허의 도시를 발견한다.
에스파니아가 잉카를 정복한 뒤에도 마추픽추는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수림과 봉우리,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켰기 때문이다.
마추픽추는 작은 틈도 없이 정교하게 바위로 겹겹이 쌓아 만들어진 도시다. 20톤이 넘는 바위를 600미터 아래의 바위산에서 직접 채취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늘 위 도시’ 마추픽추를 빗속에서 걷는다. 안개가 걷힐 때마다 카메라에는 수묵화 같은 풍경이 담긴다. 파수꾼의 전망대가 있는 마추픽추 산으로 올라가자 라마들이 노닐고 있다. 이곳에 서면 정말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하다. 비록 지금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고 있지만.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된 것이다. 마추픽추는 제례의식의 중심지였고 약 1200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추픽추는 테라스 형태의 농업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을 재배하고 가축도 길렀다.
마추픽추 안에는 200개의 건물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집 혹은 저장고로 사용되던 곳으로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 또 식수와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고랑이 이어져 있다.
광장 주변에는 종교 건축물이 있다.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왕의 묘 등이다. 왕의 묘라는 이름과 달리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세 계단은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데 각각 지하(죽음), 지상(현생),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근처에는 왕의 궁전이 있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거대한 돌을 깎아만든 것으로 해시계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마추픽추가 어떤 도시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마추픽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한 종교의 중심지라는 설,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라는 설, 잉카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뒤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와이나픽추
하늘에서 더 근사한 모습의 마추픽추를 보려면 와이나픽추에 올라가야 한다.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 바로 옆에 우뚝 솟은 해발 2770m의 바위산이다. 이곳은 2016년 유네스코가 ‘위기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오전 7~8시 200명, 오전 10~11시 200명 등 하루에 총 400명만 입장이 가능하다. 미리 인터넷으로 입장권을 예매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도 출국 전 미리 마추픽추 웹사이트에서 예약했다.
와이나픽추 입구
마추픽추를 거의 다 돌아보고 와이나픽추 입구까지 왔는데 오전 9시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다.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마추픽추를 빠져나갔다. 마추픽추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한 번에 한해 재입장이 허용된다.
마추픽추 관람은 일방향이다. 한 번 나가는 쪽을 택하면 돌아갈 수 없다. 관람객의 노선이 엉켜 부딪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마추픽추의 지반이 약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도 이런 경로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추픽추를 재입장하는 동안 비가 그쳤다. 재입장할 땐 여권은 보지 않는다. 우비를 가방 안에 집어 넣고 걸었다. 안개가 짙게 끼어서 첫 번째 들어갈 때보다 가시거리가 더 짧다. 지금 들어온 사람은 안됐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급하게 걸었다. 10시까지 다시 와이나픽추 입구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와이나픽추로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이름과 나이와 국적과 입장시간을 적고 싸인해야 한다. 나올 때도 싸인해야 한다.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을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인데 워낙 산새가 험해 실종자가 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길은 하나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은 같은 길을 간다. 와이나픽추를 올라가는 길은 한 계단 한 계단 바위를 밟고 하늘을 향하는 과정이다. 햇볕이 강해 온몸에 땀이 흐르는데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진다. 중간중간 그늘이 나타날 때마다 쉬면서 걸었다. 잉카인들은 대체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도시를 지어 나를 고생시키는 것인가. 하지만 잉카인들이 700년 후 웬 한국 남자가 여기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상까지 오르는데 1시간 30분정도 걸렸다. 희망고문처럼 10분만 더, 10분만 더를 반복한 끝에 도착했다. 마지막 경사는 거의 네 발로 기어 올라가는 수준이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마추픽추를 내려다본다. 하늘 도시 마추픽추가 정말 작게 보인다. 마추픽추까지 올라가는 지그재그 길도 한눈에 보인다. 마음껏 두 팔을 벌려 정상 등정을 만끽한다. 와이나픽추 정상에 뭔가 신전 같은 게 있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것도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올라갈 땐 힘들어서 몰랐는데 와이나픽추 중턱에 달의 신전이 있다고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한 곳이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신성한 산이다. 마추픽추에서 와이나픽추를 보면 퓨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와이나픽추에서 마추픽추를 내려다 보면 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살리다. 와이다픽추에서 죽을 뻔했는데 살려준다니 감사할 따름.
정상에 오른 즐거움도 잠시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또다시 한참을 걸어 힘들게 산을 내려왔다. 바람이 조금씩 불어서 그나마 땀을 식혀주었다.
와이나픽추 퇴장시간은 오후 1시 15분. 거의 3시간가량 와이나픽추에 있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이제 쿠스코까지는 모든 것의 역순이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르헨티나 여자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우슈아이아’라는 곳을 알려줬다. 눈 덮인 모습이 멋진 곳이었다. 트레킹을 하러 많이 간다고 했다. 그녀가 친구들과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사진으로 보니 산을 오르면 꼭대기에 커다란 호수도 있다. 언젠가 우슈아이아에 가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버스에서 내릴 때 작별인사를 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노래하는 버스커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잉카의 전통 노래 몇 곡을 들려주었다. 팁이 전혀 아깝지 않은 공연에 기분이 좋아졌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
그리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기차 차창 밖으로 멀리 만년설 봉우리들이 보인다. 마추픽추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도 이제 모두 안녕이다.
>> 일주일간 페루 (4) 마추픽추 와이나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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