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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비에하(Torrevieja)는 ‘옛 탑’이라는 뜻입니다. 1802년까지 이곳은 탑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진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알리칸테주에 속하고 인구는 10만명 정도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토레비에하에는 핑크빛 호수가 있습니다. 이름은 ‘토레비에하의 염전(Las Salinas de Torrevieja)’입니다. 영어로는 '핑크 레이크'라고 합니다. 핑크 레이크는 호주, 볼리비아, 러시아, 탄자니아에도 있다고 하는데요. 그중 호주의 핑크 레이크가 가장 유명하죠. 우연히 검색을 통해 스페인에도 핑크 레이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알리칸테에서 차로 1시간 거리더라고요. 그래서 곧장 내려왔습니다.



염전을 소개하기 전에 우선 여기 내려오는 길이 쉽지 않았다는 것부터 써야겠네요.


알리칸테에서 차를 몰고 50분 정도 달렸더니 토레비에하에 거의 도착했더라고요. 우회로(roundabout)가 계속 나오는데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한적한 동네라 그냥 계속 직진하듯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우회로에서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제 차가 우회로를 진입하는데 왼쪽에서 이미 우회로를 돌던 차가 다가오더니 제 차의 왼쪽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입니다. 제 차 옆문은 찌그러졌고, 상대방 차는 앞 범퍼와 후드가 망가졌습니다. 느리고 한적한 동네여서 옆에서 갑자기 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첫 느낌은 “어떡하지?” 였습니다. 스페인에서 교통사고라니요. 일단 차에서 내렸습니다. 다행히 몸이 다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상대방도 차에서 내렸고요. 그 차에는 남자 두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우회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일단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저만 당황해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자신이 스웨덴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5년째 여기 살고 있대요. 자동차 정비 일을 한대요. 그럼 전문가네? 그랬더니 그래도 사고난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웨덴 친구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고 저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로 대화했습니다. 다행히 그 친구의 동승자가 스페인 사람이어서 우리는 사고를 처리하면서 그 동승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요? 그건 차차 파악해 봐야죠. 일단 믿는 수밖에요.


우리는 사고현장의 모습을 사진 찍어 기록을 남기고, 차를 근처 슈퍼마켓 주차장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보험사와 경찰서에 전화를 했고요. 보험 처리를 위한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렌트카는 이 과정이 참 단순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더라고요. 풀보험을 들어놔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렌트카 업체에 전화해서 사고난 것을 알렸는데요. 상담원이 안 다쳤냐고 물어보더니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니까 근처 업체 주소를 알려주면서 거기까지 몰고 가면 다른 차를 내줄 거라고 하네요. 그런데 제 차가 운전 못할 정도로 부딪힌 것은 아니어서 그냥 타기로 했습니다.


이제 상대방 차의 보험 처리가 끝나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보험 서류에 사고가 난 경위를 자세하게 적었습니다. 그림까지 그렸습니다. 그리고 복사본을 하나씩 나눠가졌어요.



그 과정을 다 하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날씨는 덥고 시간은 가는데 경찰은 오지 않네요. 목 마르지 않아? 뭐 좀 사먹을래? 라고 스웨덴 친구가 저에게 물었고, 그래서 우리는 슈퍼마켓으로 들어갔습니다. 스페인 하면 오렌지잖아요. 발렌시아 오렌지는 별로 맛이 없었는데 토레비에하는 다를지 모르니까 저는 1리터짜리 오렌지쥬스를 샀습니다. 마트 안에 오렌지를 직접 짜서 갈아주는 기계가 있더라고요. 스웨덴 친구는 맥주와 물을 사더군요. 흠.


목을 축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처음에 당황했던 느낌도 많이 사라졌고요. 이제 경찰이 오면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주차장에 걸터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쥬스와 물을 마셨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교통사고난 것은 처음이라고 했더니 스웨덴 친구가 자기도 처음이랍니다. 스웨덴에서 왜 여기 왔냐고 했더니 날씨가 좋은 스페인에서 살아보고 싶었다고 하네요.


1시간이 더 지나 경찰차가 왔습니다. 두 명의 경찰관이 내립니다. 세상 귀찮은 표정이었는데 현장에 웬 동양인이 있으니 호기심이 일었는지 자동차 주변을 두리번거리네요. 제 차 옆구리 찌그러진 것을 유심히 보더니 우리가 작성한 보험 서류도 훑어보더라고요. 스페인 친구가 상황 설명을 했고, 경찰관은 잘 해결됐다고 말하고는 떠났습니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우리 셋은 그 자리에서 셀카를 찍고 헤어졌습니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만나자면서 악수를 했죠.


토레비에하의 하얀 집들.


다시 차를 몰고 핑크 레이크로 갑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준 곳으로 갔는데 한적한 주택가 옆으로 갯벌 같은 곳이 나오더라고요. 갈대숲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정말로 핑크색 호수가 보였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립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는 좁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분홍빛 호수는 존재 만으로 신비롭습니다. 물 색깔이 핑크핑크라니요. 이런 광경은 처음입니다.


물을 마주보며 앉았습니다. 바닥에는 태양에 말라버린 하얀색 소금이 깔려 있습니다. 손을 대보니 만지는 것만으로도 짠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물에 손을 담궈봤습니다. 따뜻합니다. 옆을 둘러보니 물 속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도 보이네요. 수영이라기보다는 물 위에서 둥둥 뜨는 자신을 즐기는 것이죠. 요르단 사해에서처럼요.


갈대숲을 지나면 핑크빛 호수.

물 색깔이 핑크핑크.

바닥의 모래는 진한 소금이에요.


물이 분홍빛을 띄는 이유는 할로박테리아(halobacteria)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갈라져 나온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고, 여기에 할로박테리아가 번식하면서 물 색깔이 핑크빛이 된 것이라네요.


몸에 좋은 진흙이 많은 사해와 달리 핑크 레이크의 물은 인체에 그리 좋지 않대요. 그래서 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물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강한 염분이 그대로 느껴져서 사실 물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이긴 합니다.


인적 드문 외딴 곳에 핑크빛 호수를 보러 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갑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눈으로 사진을 한 번 더 찍은 뒤 차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3시간을 달려 발렌시아로 가야 합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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