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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비에하에서 접촉사고가 난 뒤 운전하는 게 조금 겁이 났습니다만 다시 힘을 내서 발렌시아로 향합니다. 이번엔 최고속도를 165km 정도로 줄였습니다. 해안가 도로로 가는 여유를 부리기보다는 내륙 터널을 지나는 최단거리로 갔습니다. 2시간 정도 걸린 듯하네요.


스페인 동쪽에 위치한 발렌시아 지구는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산을 넘어가면 다른 주로 가는 것입니다. 바르셀로나 방향, 마드리드 방향 등 표지판들이 자꾸만 저를 유혹합니다. 발렌시아로 돌아가지 말고 아예 저쪽으로 빠져서 바르셀로나로 가버릴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일정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라서 다시 발렌시아로 가는 차선을 유지합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발렌시아는 그래도 스페인 제3의 도시잖아요. 옆문이 찌그러진 차는 다행히 별 이상 없이 잘 달려주었습니다.


발렌시아의 '카페 카푸치노'에서 카푸치노와 크루아상 하몽 믹스토.

빠에야 마그넷


발렌시아에 도착한 뒤 이번에도 주차하느라 거의 1시간을 빙글빙글 같은 자리를 돌았습니다. 정말 다시는 스페인에서 렌트카를 하지 않으렵니다. 주차하기가 너무 힘드네요.


숙소에서 15분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에어비앤비 호스트 Amparo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벨을 눌러도 아무도 없네요.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군요. 일단 에어비앤비 메신저와 왓츠앱으로 문자를 보내 놓고 근처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다 되어 갑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립네요.


다행히 10분쯤 기다리니 암파로가 전화를 합니다. 누군가 피아노 치는 것을 듣다가 늦었다고 하는군요. 뭐 어쨌든 암파로는 집으로 왔고 저는 이제 쉴 수 있습니다.



암파로의 집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과 침실과 뒤뜰과 계단, 2층에는 방 2개와 화장실이 있는 구조입니다. 그녀에게는 큰 딸과 아들이 있는데 지금 아들은 다른 곳에 있나 봅니다. 저는 아들의 방을 쓰게 됐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갔을 때 큰 딸 라우라(Laura)가 막 들어와서 그녀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어로 Encantado라고 반갑다는 간단한 인삿말을 했더니 스페인어 할 줄 알아? 라고 묻길래 그냥 조금이라고 답했습니다. 웃을 때 귀여운 소녀였습니다.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바로 또 외출 준비를 했는데 한껏 꾸미고 나오니 정말 예뻤습니다. 23살이고 변호사가 되려고 로스쿨에 다닌다고 합니다. 라우라의 방이 바로 옆방이었는데 그녀는 집에 있을 때 레게 음악을 틀어놓더군요. 주말에는 춤을 추러 다닌다고 하네요. 저는 춤을 잘 못 추지만 배워보고 싶은 욕심은 있습니다.


암파로 집에 걸린 기념사진들

라우라와 함께 쓰는 욕실에 걸린 그림

암파로의 집 뒤뜰에서 맥주 한 잔


암파로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저에게 맥주를 마시겠냐고 물어봅니다. 뭐 날씨도 좋고 뒤뜰도 좋으니 거기서 마시자고 했습니다.


암파로도 그렇고 라우라도 그렇고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합니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해야 하는데 제 스페인어 실력은 형편 없어서 구글 번역의 도움을 받아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저는 루이스 폰시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중에 Echame la culpa를 좋아해요. 암파로는 이 노래를 잘 몰랐는데 라우라는 알고 있네요. 저는 아이폰으로 이 노래를 틀었습니다. 흥겨운 라틴팝이 흘러나오고 하늘은 깨끗합니다. 날은 이제 막 저물려는지 오렌지빛 노을이 서서히 내려옵니다. 우리는 맥주 한 병씩을 들고 저녁을 즐기고 있습니다. 완벽한 저녁이었습니다.


잠시 후 라우라는 친구가 아들을 낳았다며 거기 가야 한다고 준비한 선물을 들고 떠났습니다. 같이 사진을 못 찍은 게 아쉽네요.


암파로의 집 2층에 심은 꽃

뒤뜰에 걸린 자전거

암파로와 함께


암파로는 활동적인 사람은 아닌 듯했지만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제 방에도 그동안 에어비앤비로 온 게스트들과 찍은 사진들이 있더라고요. 저도 암파로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도 이제 그 방에 전시가 되고 있겠네요.



밤이 늦었지만 그냥 잠들기 아쉬워서 숙소 주위를 산책했습니다. 암파로가 추천해준 바르(Bar)가 있어서 가봤는데 너무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더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있는 바르에 가서 맥주와 연어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걷다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있는 골목이 있더라고요. 토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모인 듯했어요. 해는 지고 날씨는 조금 서늘해졌지만 다들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오늘은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교통사고도 처리했지요.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하고 또 대처하게 합니다.


토요일밤 골목에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요.


다음날 아침 짐을 싸고 내려와 암파로와 작별인사를 나눴습니다. 암파로는 커피 한잔 하겠냐고 묻더니 어제 저녁처럼 뒤뜰로 저를 불렀어요. 거기서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며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웃나라였어요.


암파로에 따르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을 많이 해서 사이가 좋지 않은 반면 이탈리아와는 사이가 좋다고 하네요. 그래서 저는 한국은 일본과 사이가 아주 나쁘고, 중국과는 조금 나쁘다고 말했지요. 암파로는 스페인 사람들은 일본인은 호전적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인은 일중독자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네요. 반면 한국 사람은 상대적으로 볼 기회가 많지 않은가 봐요. 발렌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은 많지 않으니까요.


암파로와 작별의 포옹을 했습니다. 저는 다음 번엔 스페인어를 더 많이 배워오겠다고 했고, 암파로는 영어를 배우겠다고 말했어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교감을 한 것 같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발렌시아 과학예술 박물관

멀리서 바라본 과학예술 박물관


차를 몰고 과학예술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발렌시아를 떠나기 전 꼭 보고 싶은 건축물이었거든요. 옛날 건물이 많은 발렌시아라는 도시와 잘 매칭이 되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건물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딱정벌레를 모티프로 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밖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마침 주변에서 마라톤이 열리고 있더라고요. 공기도 좋고 날씨도 좋아서 달리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떠나야 하는 걸요.



여전히 못 먹어본 음식이 많습니다. 아쉽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식혜라는 오르사타와 멜론 얹은 하몽을 먹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런던에 비하면 발렌시아 물가는 정말 저렴하기 때문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데요. 렌트카 주차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하다보니 식사를 대충 때운 적이 두 번 있었는데 그게 못내 아쉽습니다.


중앙시장 메르카도 센트랄

하몽 이베리코

감바 프레스카

나바로 식당

나바로 식당의 샐러드

빠에야는 조금 짜요.

아이스크림 디저트

오르사타를 파는 노점. 문을 닫아서 못 먹었어요.

사진은 찍어가라시네요.


발렌시아 공항에 도착해 차를 반납했습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끝나더라고요. 사고내역이 적힌 보험 서류를 제출하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제 스페인과 작별이네요. 다음에 언제 또 스페인에 올 수 있을까요? 2009년에 이어 2018년에 왔으니 다음엔 2027년에 오게 될까요?


다시 올 기약은 없지만 그 순간 최대한 즐기고 집중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또 좋은 일도 있고...

여행은 그런 것 같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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