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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방문은 두 번째입니다. 베를린은 워낙 정치적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한 도시지만 이번에는 무거운 역사를 보존한 장소와 함께 베를린의 현재도 보고 싶었어요. 베를린은 공연, 클럽, 전시 등에서 트렌드를 선도하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체크포인트 찰리, 브란덴부르크 토르 등 역사적인 현장과 함께 베를린 영화제가 열리는 소니센터의 영화박물관, 베를린 비엔날레가 열리는 미술관도 찾았습니다.


전쟁에서 생존한 뒤 1960년대에 죽은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공원


일단 독일에서 느낀, 다른 유럽과 다른 특징부터 적어보겠습니다. 베를린과 뮌헨은 문화생활 환경이 풍부하고, 대중교통이 촘촘하고, 언어보다 픽토그램으로 넛지하는 도시였습니다. 언어를 가급적 쓰지 않고 만국공통어인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정말 강했어요.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베를린이 미술과 디자인에서 트렌드를 선도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런던만 해도 지하철을 타면 “문에서 떨어지세요. 문 사이에 물건 끼면 당신 때문에 열차 지연됩니다. 티켓 안보여 주면 벌금 80파운드. 열차 다른 칸으로 지나가다가 죽을 수도 있음” 등등 문구가 많은데요. 독일 지하철에는 그런 문장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픽토그램으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S는 S반, U는 U반 같은 안내는 물론이고요. 오륜기는 올림픽 경기장 가는 방향, 축구공은 월드컵 경기장 가는 방향을 나타내고, 음식물 반입 금지, 개는 타도 된다는 것 등 모든 것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돼 한참 쳐다봐야 했지만, 계속 보다보니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직원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구밀도가 낮고 최저임금이 높아 노동력이 귀한 유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긴 한데요. 지하철에서는 모든 것을 자판기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버스 안에도 티켓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어서 거기서 사도 됩니다. 버스 운전사는 손님이 티켓을 갖고 타든 말든 신경쓰지 않아요. 티켓 검사는 불시 검문을 하는 직원이 따로 있는데 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하철에는 개찰구가 따로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한 칸만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계단으로 지하 2,3층 막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정말 편리하더군요.


아무래도 런던이나 서울에 비해 인구가 적으니까 이처럼 신뢰에 기반한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독일 사람이라고 무임승차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걸리면 수십배의 징벌적 벌금을 물기 때문에 차라리 제대로 내고 타는 게 더 이득이죠. 무임승차는 오히려 관광객이 많이 한다고 해요. 그래서 검사원들도 관광객 위주로 검문을 한다는군요.


베를린 테겔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교통카드 1일권을 사서 펀칭합니다.

베를린 U반은 깔끔하고 편리합니다.

U반 입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단 하나만 내려가면 바로 플랫폼입니다.

S반에는 자전거를 들고 탈 수 있습니다.


베를린 테겔 공항의 첫 느낌은 그저 그랬습니다. 공항 외관은 낡았고, 버스를 어디서 타야할지도 잘 몰라서 헤맸거든요. 표지판에 많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낯선 관광객에겐 헤매는 사유가 됩니다. 픽토그램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1일권 교통 티켓을 구입한 뒤 버스를 탔습니다. 숙소까지는 40분가량 걸리네요. 코흐슈트라세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었습니다. 아파트 4층 벨을 눌러 올라가니 푸옹(Phuong)이라는 앳된 베트남 여성이 맞이해 줍니다. 그녀는 집을 구경시켜줬습니다.


위층 창밖으로 정원과 맞은편 아파트가 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입니다. 푸옹은 베트남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여기 온지 4주 됐다며 귀엽게 웃어보였습니다. 그녀는 김치도 만들 줄 안다더라고요. 함께 사는 독일 남자 게릿(Gerrit)과 8월에 결혼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베트남에 가본 기억을 더듬어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하노이가 좋다고 하자 푸옹은 호치민은 복잡해서 싫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다음에 베트남에 가게 되면 Highland city에 있는 Buon ma thuot에 가보라고 추천해줬습니다. 또 Dala city에 가면 꽃이 예쁘고 커피가 맛있다고 하네요.


푸옹과 게릿이 사는 집은 4층에 있습니다.

푸옹과 게릿이 사는 집 2층입니다.


게릿은 커피를 좋아하고, 푸옹의 집은 커피 농장을 합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커피를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듯해요. 지금도 푸옹의 집에서 베를린으로 커피를 보내준다고 하네요. 다음날 아침 게릿을 만났는데 얼핏 30대 중반처럼 보였습니다. 푸옹은 20대 초반처럼 보였으니 한국 농촌으로 시집 오는 베트남 여성들처럼 그렇게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는 커플은 아니었습니다.


무스타파 게뮈제 케밥 원조 가게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1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저렇게 고기를 잘라서 케밥을 만들어요.

푸짐하고 맛있고 무엇보다 저렴합니다.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근처에 무스타파 야채 케밥이라는 맛집이 있다길래 가봤더니 노점 앞에 꽤 긴 줄이 늘어서 있더라고요. 저도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케밥을 사먹었습니다. 4유로에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가성비가 좋은 집이더라고요.


숙소에서 가까운 지하철역 앞에 체크포인트 찰리가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시절 미군 검문소로 쓰이던 곳입니다. 지금은 관광객만 오가는 곳이죠. 맞은편에 베를린 장벽 파노라마 박물관이 있길래 들어가 봤습니다. 한 노작가가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찍은 사진들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묶은 전시입니다. 거대한 파노라마관에서 베를린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비싼 입장료에 비하면 전시 내용은 그저 그랬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

베를린 장벽 파노라마 전시회

예전 베를린은 이렇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서베를린은 영국, 프랑스, 미국이 삼등분했네요.

1989년 역사적인 해의 베를린

마그넷이 너무 예뻐서 세 개 샀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 옆 길을 걷다가 큰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는데 품질이 다르네요. 예쁜 상품들이 많아서 예정에도 없던 마그넷을 세 개 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는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마그넷을 하나씩 사고 있는 듯합니다. 계획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예쁜 마그넷들을 발견할 때마다 구입하게 됐네요.


저녁은 TV타워와 니콜라이 교회 근처에 위치한 오래된 식당 Zur Gerichtslaube에서 먹었습니다. 1270년에 열었다는 유서 깊은 식당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보수를 했는지 그렇게 오래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고요. 다만 야외 테이블은 운치가 있었습니다. 흑맥주와 감자 수프, 소시지 요리를 먹었는데 맛있네요. 관광지 식당은 맛이 별로라는 편견을 날려버릴 정도로 대단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 찾을 만합니다. 10% 팁을 주고 나왔습니다.


TV타워가 보이는 클로스터 슈트라세 역에 내렸습니다.

저녁 9시 해가 지고 불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13세기부터 영업했다는 식당 외관입니다.

독일 하면 역시 맥주죠.

그리고 소세지도요.


베를린의 밤은 고요합니다. TV타워 근처를 걷고 있으려니 예전 대학생 시절 베를린에 왔을 때도 TV타워 근처에서 새벽 늦게 걸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평온한 곳이니 밤에 걸어도 별 일이 없었겠죠.



런던을 떠나올 때 톰이라는 친구가 베를린에 가면 ‘버건(Berghain)’이라는 클럽에 꼭 가보라고 했었는데요. 밤이 되어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원래는 게이클럽이었는데 지금은 워낙 유명해져서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고요. 드레스코드는 올블랙이라고요. 가면 정말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들이 많이 올거라고요. 새벽에 해가 뜨면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 톰이 말했었죠.


그런데 혼자서는 클럽에 못 가겠더라고요. 뜻이 맞는 친구가 있었다면 같이 갔을텐데요. 망설였지만 혼자서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날씨도 꽤 쌀쌀해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나 9시반쯤 나왔습니다. 특별히 일정을 정해놓지 않고 생각나는대로 돌아다니기로 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토르에는 언제나 관광객이 많습니다.

거리에서 솥뚜껑 같은 악기를 연주하더라고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브란덴부르크 토르였습다. 지난 번에는 공사중이어서 못 봤거든요. 드디어 이 문을 드디어 제대로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했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달라진 것이 있더라고요. 예전엔 이 문 뒤 공원으로 곧장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있더라고요.


저는 다시 버스를 타고 미술관들의 섬으로 갔습니다. 교통카드 1일권을 사놓으니 아무 때나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있어서 편합니다. 저처럼 목적지가 없는 여행자에게는 더 제격인 것 같아요.


국가의회 의사당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알테스 뮤지엄(Altes Museum)

알테스 박물관 앞 분수대에 무지개가 피었네요.

베를린 돔

베를린 돔 앞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

알테스 뮤지엄 앞 역동적인 여인의 기마 동상

노이에스 뮤지엄(Neues Museum)

노이에스 뮤지엄 소장품

노이에스 뮤지엄 소장품. 제가 찾은 테마는 '두 사람'입니다.

애절하게 바라보고

입을 맞추려 하고

꽃으로 유혹하네요.

같은 포즈를 취해봅니다.


미술관들의 섬에는 다양한 미술관이 있더라고요. 어디를 가야할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다가 Neues 박물관에 들어갔습니다. 고대 그리스 등 옛날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었습니다. 구경하고 나오니 바로 옆 페라가몬 뮤지엄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라고요. 페라가몬에도 갈까 하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부터 찾기로 했습니다.


강 건너 암펠만(Ampelman)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암펠만은 베를린을 대표하는 캐릭터 이름입니다. 신호등 초록색 불이 켜지면 암펠만이 나타납니다. 기념품 숍에도 다양한 암펠만 기념품들이 있더라고요. 저는 머그컵과 백팩을 사서 지금도 잘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식당 역시 암펠만을 상호로 택하고 내부 곳곳에 암펠만 캐릭터를 전시해 놓았어요. 잘 만든 캐릭터 하나가 이처럼 도시의 기호를 풍성하게 해줍니다.


암펠만은 어디에나 있어요.

베를린 신호등 암펠만이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베를린의 마스코트 암펠만

빨간색 신호등은 녹색보다는 별로네요.

아페롤 스피리츠면 충분해요.

슈프레 강변의 평화로운 풍경

Neundrei 카페


퀴쉬와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습니다. 이탈리아 칵테일인 아페롤 스프리츠는 달콤하고 시원해서 좋습니다. 은근히 도수도 꽤 있는 술이에요. 저는 유럽에만 오면 이 술을 마십니다.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점심을 먹은 뒤 커피가 맛있다는 인근 Neundrei 카페에 가서 플랫 화이트 한 잔을 마셨습니다. 혼자 여행해도 할 건 다 합니다.


슈니첼은 딱딱해요.

독일에선 역시 소시지죠.


미술관으로 다시 갈까 하다가 반대편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이 보이길래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Hackescher Markt라는 재래시장입니다. 유럽의 시장 구경은 신납니다. 형형색색의 과일들과 다양한 식재료들, 신기한 골동품들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저는 살구를 먹으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시장 구경을 끝내고 지하철을 타고 소니센터로 갔습니다. 베를린영화제 사무국과 영화 박물관이 있는 곳이죠. 티켓 판매하는 직원이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월드컵 이야기를 하며 씁쓸하게 웃습니다. “너네가 우리를 킥오프시켜 버렸어.” 맞아요. 그랬죠. 하지만 한국팀이 잘한 것도 있지만 독일 축구가 형편없이 추락했죠.


독일영화 박물관은 정말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신비한 거울의 방을 지나면 고전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세트장부터 최신작 ‘토니 에드만’의 털복숭이 인형까지 독일영화의 모든 것이 전시돼 있습니다. 과거 영화계를 주도하던 ‘푸른 천사’ ‘M’ ‘메트로폴리스’ 같은 고전영화들 뿐만 아니라 오버하우젠 선언,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 마를렌 디트리히 같은 디바들, 파스빈더, 빔 벤더스, 톰 티크베어,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미카엘 발하우스 같은 촬영감독 등 꼼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독일 영화계는 침체돼 있지만 이 나라의 영화 저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소니센터

베를린영화제 사무실

제61회 베를린영화제에선 잉마르 베르이만 회고전을 했나봐요.

문이 닫힌 사무실은 밖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소니센터에선 헬무트 디틀 감독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헬무트 디틀 사진들

헬무트 디틀 영화들

헬무트 디틀 전시회는 9월 말까지 합니다.

독일 영화박물관 입구는 이렇게 거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거울의 방은 정말 근사해요.

셀카를 찍게 됩니다.

독일 고전영화를 보는 관람객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프리츠 랑의 'M'

요세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푸른 천사'

메트로폴리스

논란의 '올림피아'도 있네요.

워너 형제가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에 '한여름 밤의 꿈' 판권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

오버하우젠 선언

토니 에드만의 털복숭이 코스튬

데이빗 린치의 책 'Room to Dream'


영화박물관을 한참동안 둘러본 뒤 소니센터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 검색해보니 ‘미테(Mitte)’라는 곳이 핫플레이스라고 하더라고요. 중심가라는 뜻의 미테에는 액세서리 숍들과 패션 숍들이 있고 곳곳에 갤러리가 있습니다.


소니센터 내부의 조형물

포츠다머 광장

이쪽이에요!

런던에서 열린 반트럼프 시위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렸네요.

색소폰과 키보드 버스킹

한식은 이미 국제화가 되었나봅니다. 한식당 서울주방 손님 중 한국인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쓸쓸한 곰인형


미테를 걷다가 한 갤러리로 사람들이 들어가길래 저도 따라들어갔습니다. 베를린 비엔날레 전시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이 궁금해 티켓을 샀는데 무려 16유로나 하네요. 미술관 규모에 비해 비싼 가격이라 정말 이 가격이 맞는지 갸웃거리며 티켓을 샀는데 안내를 맡은 남자가 이 티켓으로 베를린의 갤러리 4곳을 관람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이 베를린 마지막 날이라 다른 갤러리는 갈 수가 없는데요. 게다가 이미 6시가 넘어서 전시 마감 시간까지 4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그는 다른 티켓은 없다며 다 보고 나서 친구에게 티켓을 팔라고 조언해 주네요. 하지만 저는 친구가 없는 걸요. 그랬더니 그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장권인 스티커를 하나 더 줍니다. 기념으로 가져가라는 거예요.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저는 40분밖에 남지 않은 전시 시간 동안 알차게 갤러리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현대미술은 확실히 제멋대로라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한 곳은 창문을 노란색 셀로판지로 막아 놓고 바닥에는 재를 뿌려놓은 곳이 있었고, 또 한 곳은 어두운 바처럼 꾸며놓은 곳이 있었습니다. 또 한 곳은 사방을 플라스틱 비닐로 막아놓았는데 바닥이 마루 재질이라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양에선 익숙한 마루인데 여기선 신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미테 지구

벽화가 멋진 미술관

현대예술은 난해해요.

Ich Liebe Meine Vagina.

마음에 들었던 그림


계단을 올라가며 층마다 전시를 관람하고 있자니 3층에서 한 동양인 여자 안내원이 다가옵니다. “티켓 사셨으면 스티커 있으시죠?” 영어로 묻네요. 저는 주머니에 넣어둔 스티커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그걸 받아서 스티커를 떼서 제 가슴에 붙여주었습니다.


전시를 다 보니 7시가 다 되어 갑니다. 내려가는 길에 3층에서 그 안내원을 다시 만났습니다. 아무래도 영어 발음이 한국 사람인 듯해서 한국말로 인사했더니 놀라네요. 그녀는 베를린에서 6년째 살고 있다고 하는군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지금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요.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논문을 써야 한다면서 가버렸습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갔습니다. 이곳은 야외라서 운영시간이 따로 없는 곳이죠. 관광객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요. 가는 도중 일렉트로닉 랩을 하는 버스커도 만났습니다. 확실히 베를린 버스킹은 다른 도시와 다릅니다. 더블린이었으면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을텐데 여기서는 랩을 하네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Berlin 1989-1990

Lead me on my dreams among different time and space.

운전대를 잡은 고르바초프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개에게 물리고 군인에게 잡히고 땅굴도 파고...

붕가붕가!

기울어진 도시?

형제의 키스 앞 자매의 키스

비둘기가 실어온 브란덴부르크 토르

신은 여자이고 블랙이다.

BERLYN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는 색감이 화려한 벽화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은 베를린 장벽 중 1.3km의 구간에 세계 21개국의 작가 118명이 벽화를 그려 유명해진 곳입니다. 벽화 중 단연 인기 작품은 드미트리 브루델이 그린 ‘형제의 키스’죠. 소련과 동독의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와 호네커가 입을 맞추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이 유명한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그림과 함께 사진 찍는 사람들도 구경했습니다. 남녀, 여여끼리 키스하면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끔 남남도 있었는데요. 그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이 그림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인상적인 그림들이 더 있었어요. 신은 흑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쓴 그림, 희망의 문을 끌어올리는 비둘기 등입니다.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남아서 훌륭한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뒤편에는 슈프레 강이 있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여기서도 누군가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놨네요. 조용히 산책하고 싶은 사람은 멀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일렉트로닉을 좋아하는 걸까요? 이렇게 노을이 예쁜 강변에서도 일렉트로닉이라니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뒤쪽의 슈프레 강변

색소폰 불고 랩하는 버스커

기찻길

사랑이 넘치는 거리


저녁은 퓨전 요리를 하는 식당에 갔습니다. 타파스처럼 작은 접시에 나오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슴 혀로 만든 프라이, 순대 비슷한 블랙 푸딩, 담백한 포크 벨리, 부드러운 부라타 등을 먹었습니다. 전부 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는데 그게 또 다 맛있었네요. 트립 어드바이저의 추천을 받을 만합니다.


퓨전 요리를 선보이는 맛집

처음 맛본 퓨전 요리들

최고예요


이렇게 베를린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길눈이 조금 뜨였는데 내일이면 베를린을 떠나야 합니다. 익숙해질 만하면 떠나는 것이 여행입니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 하기 전 위층으로 올라가 봤습니다. 푸옹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푸옹은 없고 게릿이 자다 깨서 부시시한 머리로 부엌을 서성거리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처음으로 인사하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게릿과 저는 음악에서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는 고등학생 때 DJ를 꿈꿨다고 하는군요. 지금은 은행에 다니면서 취미로만 음악을 한다고요. 2층 한켠에는 디제잉 장비도 준비돼 있는데 그가 음악을 틀면 이웃들은 베란다로 나와 춤을 춘다고 합니다. 그가 만드는 음악은 118bpm에서 136bpm 사이의 빠른 FX를 사용한 음악이라고요.


모처럼 음악 이야기로 대화가 통했지만 뮌헨으로 가는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게릿과 헤어진 뒤 중앙역으로 갔습니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암펠만 후드티셔츠와 쿠키용 커터를 기념품으로 샀습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과 슈니츨을 산 뒤 플랫폼으로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티켓을 출력할 기계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구입한 티켓은 기차역에서 출력하는 티켓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티켓 오피스의 자판기에서 출력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판기에는 출력하는 옵션이 없습니다. 구입하는 것만 가능합니다. 황당해서 한참을 찾았지만 정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담원을 만나야 하는데 번호표를 뽑으라고 하네요. 대기 인원이 많아 15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렴 여긴 직원 만나는 게 힘든 독일인데요. 가까스로 상담원을 만났는데 그녀는 여기서는 티켓 구입만 가능하니 기차에 가서 안내원(conductor)을 만나라고 합니다.


기차는 8시 30분에 떠납니다. 지금은 이미 28분이고요. 마음이 급해진 저는 플랫폼을 향해 뛰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습니다.


베를린 중앙역


멘붕에 빠진 저는 다시 올라와 티켓 오피스에서 20분을 기다려 상담원을 만났습니다. 저는 기차를 놓쳤다고 항의했지만 직원은 9시 30분에 떠나는 다음 열차 스케줄표를 보여주며 플랫폼에 가서 안내원을 만나라고만 합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기차역에서 출력하는 티켓(print@station ticket)을 샀는데 티켓을 출력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티켓 없이 다음 열차를 타면 기차 안에서 몇 배의 벌금을 물게 될 것이 뻔한 것 같아서 결국 자판기에서 150유로를 내고 새로운 티켓을 구입했습니다. 제가 원래 예매한 티켓은 84유로였으니 거의 두 배를 낸 셈입니다.


다음 ICE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고 저는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는 정확히 9시 30분에 떠났습니다. 저는 기차 안에서 레일유럽에게 장문의 항의메일을 썼습니다. 기차역에서 출력을 할 수 없는데 ‘print@station ticket’을 팔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이후에 레일유럽에서 새로 구입한 티켓을 사진 찍어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아직까지 환불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베를린을 떠나는 마지막 기억은 이렇게 기차를 놓치는 것이 되었네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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