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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ante

- Jacques Prevert


Une orange sur la table

Ta robe sur le tapis

Et toi dans mon lit

Doux présent du présent 

Fraîcheur de la nuit

Chaleur de ma vie


탁자 위 오렌지 한 개

양탄자 위 너의 옷

내 침대 속의 너

지금의 부드러운 현재

밤의 신선함

내 삶의 따뜻함



시간을 멈춰놓고 그 순간의 풍경을 묘사한 것 같은 자크 프레베르의 ‘알리칸테’는 제가 대학생 시절 무척 좋아한 시입니다. 프랑스 시인인 그는 연인과 함께 지중해와 맞닿은 작은 도시인 이곳에 왔다가 이 시를 썼나 봅니다. 알리칸테라는 제목부터 마음을 잡아 끕니다. 계속해서 동경이 일었습니다. 도대체 알리칸테는 어떤 곳일까? 언젠가 꼭 가보고 말리라.


시속 190km로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저는 알리칸테에 있습니다. 발렌시아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왔어요. 알리칸테라는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심쿵했습니다. 그래서 액셀을 막 밟았어요. 190km까지 속도를 냈습니다. 라디오로 신나는 라틴 팝을 들으며 달렸습니다. 왼쪽으로는 지중해 바다가 펼쳐지고 날씨는 맑았습니다.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고속도로 통행료(17.40유로)도 있습니다. 나중에 돌아올 때 보니 내륙 도로로 가면 무료인데다가 2시간이면 가더라고요. 어쨌든 중간에 베니도름에 들리고 싶었는데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길래 그냥 알리칸테로 직행했습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도시 알리칸테에 가면 로맨틱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차를 주차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알리칸테의 주차 사정도 발렌시아와 다르지 않더라고요. 저는 이번에도 한참 떨어진 곳에 겨우 주차하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자동차를 주차하는데 시간을 헐마나 허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숙소는 4층짜리 아파트의 꼭대기층이었습니다. ‘양탄자 위 너의 옷 / 내 침대 속의 너’가 있는 로맨틱한 상상과는 전혀 달리 머리는 벗겨지고 턱수염 나고 덩치 큰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해줍니다. 알리칸테에서 처음 만난 사람 이 사람의 이름은 루벤. 저는 앞으로 알리칸테를 루벤으로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ㅠ


루벤의 집 거실.


다행스럽게도 집에는 루밀라와 에밀라도 있었습니다. 러시아 여자 이름을 가진 이들은 고양이에요. 그렇잖아도 저는 고양이를 키워보고 싶었는데요. 오늘은 미리 체험을 해볼 수 있게 되었네요.


마침 월드컵 스페인 대 포르투갈 전이 막 시작되어서 루벤은 TV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축구를 같이 보자고 말했고 루벤이 맥주를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방에 짐을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함께 봤습니다. 포르투갈 호날두가 첫 골을 넣어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이내 동점골, 역전골이 터지자 창밖으로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경적 소리를 냅니다. 작은 도시 알리칸테에서도 스페인의 축구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날 미겔도 그랬지만 루벤 역시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2002년 월드컵 8강전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때 심판 때문에 졌다고요. 심판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이집트 심판 간도르네요. 스페인 사람들은 다들 이 경기를 기억하고 있나봐요. 정말 억울한가 봐요. 가해자인 우리는 다들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데요. 피해자는 도저히 잊을 수 없나 봅니다.


루밀라는 월드컵에 관심이 없네요.


생각해 보면 그 경기 오심 때문에 우리가 이긴 것 맞습니다. 후반전 김태영이 자책골을 넣었을 때 엘게라의 반칙이 선언됐고요. 연장전 모리엔테스가 골을 넣었을 때 그 전에 호아킨이 선을 넘어간 공을 차 올렸다고 노골이 선언됐지만 비디오로 다시 보니 분명히 선을 넘지 않았죠. 스페인 입장에선 정말 억울할 만합니다.


저는 루벤에게 축구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심판도 경기의 일부잖아 라고 매우 이영표스러운 말을 했지만 지금에서는 반성합니다. 그 경기는 오심 때문에 우리가 어거지로 이긴 거 맞아요. 스페인의 남미 침략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그런 경기가 되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축구는 결국 3:3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호날두가 해트트릭을 기록했어요. 스페인은 이길 뻔한 경기를 호날두의 마지막 골로 비겼습니다. 헤드라인은 ‘Ronaldo saves Portugal’이 되어야 하는 경기였습니다.


루벤은 결과에 만족하는 듯했습니다. 조별예선에서 포르투갈이 가장 어려운 상대였는데다가 원래 스페인은 월드컵 첫 경기에선 매우 약하고 시합이 거듭될수록 강해진다는 겁니다. 게다가 최근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와 이중계약 문제로 경질되고 이에로가 임시 감독으로 부임한 터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무승부는 괜찮다는 거예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죠.



루벤은 이제 여자친구가 올 거라고 했습니다. 어, 루벤에게도 여자친구가 있구나. 그런데 왜 제가 당황스러울까요. 하하. 여자친구가 최근 새로 이사했는데 내일은 거기 가서 페인트칠을 해줘야 한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 보니 우리 꽤 친해졌나요? 그래봤자 저는 내일 알리칸테를 떠나는데요.


숙소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케밥집에 들러 Pita Kebab을 먹었습니다. 3.5유로밖에 안 하는데 엄청 양이 많네요. 런던보다는 확실히 물가가 쌉니다.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동네 주민들.

가족 식사 중에 빠져나온 아이들.


숙소로 돌아오니 루벤은 없고 루밀라와 에밀라가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얼룩 고양이 루밀라는 조용하고요. 흰 고양이 에밀라는 조용하면서도 의외로 꽤 활발합니다. 스윽 나타났다가 다시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습니다. 제가 다가가면 귀찮은 척 고개를 돌립니다. 그런데 제가 돌아서면 또 스윽 따라옵니다.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에밀라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옵니다. 그 뒤를 따라 루밀라도 올라옵니다.


강아지 같으면 바로 저에게 달려올텐데 고양이라서 그런지 둘 다 시크하네요. 루밀라는 아예 모서리 근처에 드러누웠고, 에밀라는 쪼그린 채 실눈을 뜨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세상 다 귀찮다는 표정이에요. 제가 아이폰을 노트북에 연결하려고 USB 케이블을 꺼내자 한참을 쳐다봅니다. 발을 내밀어서 만져도 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귀찮다는 듯 고개를 숙입니다. 강아지 같으면 벌써 물어 뜯었을텐데요. 그 순간 고양이랑 같이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 쿨하게 간섭 안 하고 사는 거예요. 필요할 때만 찾아오고요. 외로움이 해소되면 알아서 떠납니다.


아이폰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기다가 옆으로 돌아봤는데 어느새 루밀라와 에밀라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살펴보니 벌써 방을 나가서 자기만의 아지트인 그늘진 거실에 누워 있더라고요.


루밀라와 에밀라.

USB 케이블에 관심 많은 에밀라.

에밀라의 자리.


창밖으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고 보니 루벤이 이번 주말에 축제가 있다고 했어요.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요. 하지만 밤 12시인데 폭죽을 터뜨리나요? 역시 스페인답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어느새 에밀라가 침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녀석인가 봅니다. 잠시 저를 쳐다보더니 또 조용히 사라집니다. 반면 루밀라는 저에게 흥미를 잃었나봅니다.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어딘가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겠죠.


루벤과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너무 짧은 만남이었죠. 루벤은 일본에는 세 번 갔다는데 한국은 가본 적이 없답니다. 일본에 어디 가봤냐고 물었더니 도쿄, 오사카, 교토래요. 그런데 세 번 다 거길 갔대요. 한 번은 혼자, 두번째는 여자친구랑, 세번째는 친구들이랑 갔대요. 그러니까 두번째와 세번째 일본 여행은 자기가 가본 곳을 친구 데리고 또 간 거예요. 저였다면 그렇게 못했을텐데 대단합니다. 그 먼 곳까지 가는데 갔던 데를 두 번 더 가는 여행은 어떤 걸까요? 동행인이 바뀌었으니 장소는 같지만 분명 새로운 여행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알리칸테의 오렌지빛 햇살.


차를 몰고 산타 바바라 성으로 갔습니다. 중간에 방향을 잘못 들어가서 하마터면 발렌시아로 갈 뻔했습니다만, 다시 알리칸테로 돌아와 산타 바바라 성에 내렸습니다.



산타 바바라 성은 10시에 문을 엽니다. 시간에 딱 맞춰 입장했습니다. 이곳은 성을 보러 온다기보다는 알리칸테 해변을 내려다보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정말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갈매기가 울부짖고 짙푸른 바다는 해수욕장과 연결됩니다. 해수욕장 옆으로는 항구가 있습니다. 지중해를 지나 아프리카나 중동으로 가는 배가 거기 정박해 있습니다.


산타 바바라 성 가는 길.

산타 바바라 성.

산타 바바라 성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산타 바바라 성에서 내려다본 알리칸테.

산타 바바라 성에서 내려다본 알리칸테 항구.

산타 바바라 성에서 내려다본 알리칸테 해변.

산타 바바라 성의 카페.

오렌지 쥬스, 햄버거, 커피가 있는 풍경.

여기서도 달려요.


아, 알리칸테가 이토록 로맨틱한 곳이었지. 루벤 때문에 잊고 있던 프레베르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프레베르는 침실 창밖으로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썼을 것 같습니다. 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에요. 물론 루벤이 여자친구와 함께 여기 왔어도 시를 썼겠죠. 저는 에밀라에 관한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에밀라


실눈 뜨고 다가와서

USB 케이블 훔쳐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너

내 침대 위 너의 촉감

아침의 상쾌함

내 삶의 따뜻함



성 안에 카페가 있길래 거기서 브런치를 먹었습니다. 암부르게사, 카페 콘 레체, 수모 나란하를 주문했어요. 아침으로 든든하죠. 런던에선 앉아서 먹을 때마다 고민인데 스페인에선 팁을 주지 않아도 돼서 좋네요.


다시 차를 몰고 해변으로 내려갔습니다. 유료 지하 주차장이 있길래 차를 주차하고 해변을 걸었습니다.


알리칸테 해변에서 보트 타는 사람들.

수영하는 아저씨.

알리칸테 비치.

알리칸테 비치에서 여유로운 시간.


모래사장에서 선탠하고 축구하고 바다로 걸어가는 사람들. 수영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저뿐이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 중엔 뚱뚱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나 봅니다. 즐거우면 되는 건가 봅니다. 아무렴 여기는 프레베르를 따라 사랑의 추억을 쌓으러 오는 곳, 알리칸테니까요.


알리칸테를 떠나기 전 아이스크림 칵테일.


저는 해변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 칵테일을 먹고 이제 알리칸테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발렌시아로 돌아가기 전 검색해보니 알리칸테에서 1시간 거리에 토레비에하(Torrevieja)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호수는 핑크빛이라고 하더라고요. 로맨틱한 도시 옆에 핑크빛 호수라니 어쩐지 기대가 돼서 저는 토레비에하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토레비에하로 가는 길에 결국 사고를 내고 맙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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