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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oy en Valencia.


‘Gran via’ 거리의 벤치에 앉아 있는 지금은 오후 6시가 넘었습니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가 지나갑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한 아이가 뛰어갑니다. 저는 배가 너무 불러서 걷지 못하고 앉아 있습니다.


8시에 문 여는 스페인 레스토랑을 기다리지 못하고 차이나타운에서 밥을 먹었거든요. 너무 배가 고파서요.


개와 산책 나온 할머니.


아침에 런던 개트윅 공항을 출발해 스페인 발렌시아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렌트카를 예약했습니다. Europcar에 가서 렌트카 키를 받아들고 일단 공항 내 카페에서 카페 콘 레체 한 잔과 크림파이를 샀어요. 스페인에서는 카페 콘 레체 마셔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스페인 아니잖아요.


Europcar에서 받은 물품들.

공항에서 카페 콘 레체와 크림파이.


여유있게 앉아 있다가 렌트카가 있다고 하는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주차장이 엄청나게 큽니다. 도대체 어디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제가 받은 종이에 번호가 써 있었는데 아예 터미널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주차장이 1터미널부터 4터미널로 되어 있다면 제가 가야 하는 곳은 4터미널이라고 하는데 4터미널 자체가 안 보이는 겁니다.



빙글빙글 주차장을 계속해서 돕니다. 혹시나 싶어 차키의 열림 버튼을 막 눌러봅니다. 아무 차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차키에 Amarillo라고 적혀 있길래 노란색 차가 보이면 반가워서 막 뛰어가 봤습니다만 제 차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주차장에는 사람이 없고, 있다고 해도 바로 차 타고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거의 1시간가량 주차장에서 빙빙 돌았습니다.


해결책은 역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남자 사람이 렌트카는 여기가 아니라면서 길 건너 가라고 하는 거예요. 젠장 지금까지 계속 엉뚱한 주차장에 있었던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Europcar라고 적힌 구역을 발견하고 거기에 주차돼 있는 차에 올라 탔습니다.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날씨는 뜨겁고 저는 이미 진이 다 빠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SKODA OPEL을 타고 도로를 나섰습니다.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주차장이 됩니다.


차는 SKODA의 OPEL이라는 디젤 승용차인데요.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Europcar 직원에게 값싼 것 중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이거 줬어요. 그런데 차가 너무 크네요. 저는 소형차면 되는데 차를 보자마자 짜증이 확 났습니다. 이렇게 큰 승용차를 어떻게 몰고 다니나요. 특히 유럽처럼 주차공간이 좁은 데서 주차를 어떻게 하라고요.


덥고 짜증나고 그랬지만 일단 아이폰을 자동차에 연결해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주차장을 나오려고 하는데 끼이익 소리. 헉! 출발하자마자 기둥에 왼쪽 문을 긁어버렸네요.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벌어질 3박 4일 일정 동안 저는 차를 빌린 것을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드디어 차를 세웁니다. 이제 캐리어를 끌고 가야 합니다.


어쨌든 발렌시아 공항을 출발해 발렌시아 시내로 이동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운전이라니, 차 문은 긁었지만 그래도 도로로 나오니까 기분이 풀리더라고요. 한국에서 운전할 때와 전혀 다른 기분. 표지판도 스페인어고(당연하게도!), 도로의 차종도 다릅니다. 거리 풍경도 이국적인 오렌지빛이에요. 기분을 내면서 액셀을 밟았습니다. 시내와 가까워질수록 도로는 점점 주차장이 되어갔지만 뭐 이 정도야 한국에선 늘상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시내에 도착하자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 거의 다 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주차할 곳이 없는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정말 한 자리도 없네요. 저기 한 곳 났다 싶으면 그새 소형차가 나타나 재빨리 주차해 버립니다. 큰 차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숙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한 블럭, 두 블럭, 세 블럭 가면서 빈 주차공간을 찾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도로 가에 흰색으로 표시된 구역에 주차해야 무료입니다. 파란색 구역이나 아예 칸이 없는 곳에 주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1시간을 헤맨 끝에 드디어 네 블럭 떨어진 곳에 주차하는 데 성공합니다. 네 블럭을 더 걸어가야 숙소지만 그래도 이제 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어요. 저는 캐리어를 끌고 네 블럭을 걸어서 숙소로 갔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왔다면 벌써 숙소에서 발 뻗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렌트카를 신청한 제 손가락이 너무 미웠어요.


미겔과 젬마의 집.


숙소는 미겔과 젬마 부부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빈 방이 두 개 있어서 에어비앤비를 두 팀 받나봐요. 하나는 저였고 또 한 방에는 필리핀계 호주 남자가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이 남자와 저는 꽤 친해지게 됩니다.


일단 저는 스페인 부부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둘 다 포토그래퍼래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여주길래 팔로우를 해줬습니다. 결혼 사진 전문이더라고요. 집안 곳곳에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저도 사진을 좋아하니까 우리는 셀카를 찍었습니다.


제가 간 날이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사우디 아라비아 경기가 있나 봐요. 집주인 미겔은 제 방 TV에서도 월드컵이 나온다며 영국에서는 돈 내야 축구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돈 안 내도 TV에서 그냥 해준다며 자랑을 합니다.


확실히 축구에 대한 접근성은 영국보다는 스페인이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스페인은 어느 도시를 가도 곳곳에 팬들을 위한 상점이 있고요. 경기장 티켓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TV를 틀면 중계도 해주고요. 반면 영국에선 도심에 상점이 없고 경기장으로 가야만 팬숍이 있죠. 티켓 구하기는 대단한 정성과 노력을 요하고요. TV중계는 스카이스포츠가 독점해서 한 달에 10만원 가까운 시청료를 내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대부분 펍에 가서 경기를 봅니다.


저는 축구보다는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젬마에게 맛집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저녁이냐고 묻습니다. 시계를 보니까 4시가 넘었네요. 저는 아무 생각없이 저녁이라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에서 저녁식사는 다른 국가에서와 전혀 다릅니다. 스페인에서 저녁식사는 저녁 8시부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 어느 식당도 문을 열지 않아요. 그러니까 점심식사가 끝나는 오후 3시부터 8시까지는 어디에서도 식사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카페에 가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식사는 못하는 거예요.


원형 도시 발렌시아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시그니처 게이트.

에미르 쿠스트리차의 흔적을 여기서 발견하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일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딘가에는 문 연 식당이 있을 줄 알았어요. 특히 대성당 같은 관광지 주변을 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유일한 문 연 식당에선 이제 막 다 먹은 거대한 빠에야 팬을 종업원이 치워가고 있었습니다. 그외는 문 연 식당이 단 한 곳도 없더라고요.


걷고 또 걷다가 차이나타운을 발견했습니다. 어맛, 그런데 여기는 문을 연 곳이 꽤 있네요. 아니, 거의 다 열어놓은 것 같습니다. 물론 손님은 없습니다만... 혹시 모를 저같은 배고픈 손님을 위해서 열어둔 것일까요? 조금이라도 더 팔려고? 역시 중국인들은 근면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중국인들은 하루종일 일만 한다고 생각한대요.


밖에 메뉴가 그림으로 그려진 모퉁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손님이 딱 한 테이블 있었는데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모를 아주머니가 저를 보더니 메뉴판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중국말로 뭐라고 뭐라고 막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Menu en Ingles, por favor.


차이나타운 중국집에서 먹은 식사.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따뜻한 해산물 수프와, 고기 볶음밥 등 잘 고른 중국음식은 타파스 부럽지 않습니다. 스페인에서의 첫 식사를 중국 음식으로 하는 게 싫어서 정말 오랫동안 거리를 헤매고 다녔기에 제가 느낀 만족감은 어쩌면 그냥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다 먹었고 배는 부르니 그걸로 이미 끝난 거죠.


언젠가 타파스, 빠에야, 감바스 알 아히요, 가스파초, 토르띠야, 하몽, 파타타스 브라바스, 뽀요 알 아히요 등을 먹을 기회가 있겠죠. 그거 먹으려고 스페인 온 건데요.


그리고 나서 지금 앉아 있는 'Gran via' 벤치로 온 겁니다. 벤치에 앉아서 디저트로 길거리 마트에서 사온 오렌지를 까먹었습니다. 두 개 샀는데 하나만 먹고 하나는 버렸어요. 너무 맛이 없어서요. 발렌시아는 오렌지라더니 이거 어떻게 된 일이죠?


오렌지가 왜 맛이 없죠?


저는 한참 앉아 있다가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요. 뭔가 기대했던 발렌시아가 아닌 듯했어요. 지금까지는요. 거리에선 환상적인 오렌지를 맛볼 줄 알았고, 맛있는 빠에야 식당이 어디에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전혀 아니었던 겁니다. 그나마 오렌지 가격이 저렴해서 다행이네요. 두 개에 1200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숙소로 돌아오니 집주인이 한 남자를 소개시켜 줍니다. 호주에 사는 필리핀 사람으로 이름은 앙헬리토 칼마입니다. 발렌시아에서 2주째 머무르고 있다고 하네요. 직업은 멜버른 대학에서 비즈니스를 가르치는 교수래요. 젊은 교수네요.


Te quiero abuelo! 할아버지 사랑해라는 뜻이에요.


비즈니스로 대화의 물꼬를 트긴 했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는 주로 한국 드라마와 연예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배수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한참 동안 수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최근 양예원 스튜디오 사건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접은 안타까운 사연도 공유해 주었어요. 호주에 사는 팬으로서 네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더니 뭘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호주에 사는 팬이든 한국에 사는 팬이든 걱정해주는 것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네요.


그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하길래 같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당을 지나 타파스를 파는 식당에 갔습니다. 저녁 8시를 넘어 10시 가까이 되고 있었거든요. 드디어 타파스를 먹어보게 된 겁니다.



그런데 타파스는 그저 그랬습니다. 또르띠야는 목이 메였습니다. 화이트 와인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배수지에서 시작한 대화는 손예진으로 이어졌습니다.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알더라고요. 정말 한국 드라마 덕후였습니다. 스페인에서도 매일 노트북으로 영어자막 켜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는 거예요. 교수님 왜 이러세요…


타파스로 저녁식사.

90년 역사의 아이스크림 가게 Llanares.

콘에 두 스쿱.


더치페이를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11시가 넘어서 날이 저물었네요. 그가 아이스크림을 사겠다며 발렌시아에서 가장 맛있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90년 역사를 가진 Llinares라는 곳입니다. 2스쿱을 담은 콘을 하나씩 들고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었습니다. 한밤중에 남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은… 조금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한국 정치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었네요. 김정은과 트럼프 정상회담이 유럽에서도 화제이기 때문에 많이들 그걸 물어보는데 칼마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남북 화해무드가 재개된 이야기를 하다가 전직 대통령 2명이 지금 수감중인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엄청 놀라는 거예요. 한국 연예인은 좋아해도 한국 정치는 잘 모르세요. 교수님 왜 이러세요...


칼마는 서울을 3일 간 여행한 적 있다며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6호선 응암역 근처에 숙소가 있었는데 제가 잘 모르는 어떤 드라마에 응암역이 나왔다며 또 한드 덕후로서 재능을 뽐냅니다. 다음 번에는 제주도를 가고 싶다고 하네요. 굉장히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린대요. 주로 초상화를 그린다면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팔로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발렌시아 기차역.

성당 앞 광장.


몇 주 동안 런던에서 살다고 이야기했더니 7월에 런던 가는데 그때 또 만나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왓츠앱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3주 후 런던 레스터 스퀘어에서 다시 만나 바이런 버거를 먹게 됩니다. 그때도 한국 연예인 이야기를 했네요. 생각해 보니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한국과 끈을 만들고 싶었나 봅니다. 어쨌든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죠. 지금 만나면 앞으로 또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 게 인연이고요.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발렌시아의 밤은 저물고 있었습니다. 참, 제가 런던에 간 목적이 뉴스룸 혁신 보고서 쓰는 거라고 말했더니 칼마가 이런 조언을 해줬습니다.


“뉴스룸 혁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대안일 수 있어. 보고서 쓸 때 그걸 하나의 대안으로 만들어봐. option 3. No changes. 어쩌면 지금이 제일 잘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꼭 뭘 억지로 바꾸려 할 필요는 없어.”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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