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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택시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터널 밖엔 1980년 5월의 서울이 기다리고 있다.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개인택시 기사 김만섭(송강호)은 손님을 태우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하늘은 파랗고 거리는 활기차다.
60만 킬로미터나 뛴 초록색 브리사 택시를 애지중지하며 모는 만섭은 시위 진압으로 길이 막히자 인중에 치약을 바르고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데"를 레퍼토리처럼 읊는 그의 관심사는 오직 딸과 함께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5월 19일 저녁 계엄령 확대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지만 그는 관심없다는 듯 꺼버린다. 우리가 모두 아는 비극의 그날이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이처럼 태연하게 밝다.
다음날 만섭은 한 외국인이 광주까지 다녀오면 거금 1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솔깃해 그를 태우고 무작정 광주로 달린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지만 주인공만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는 만섭의 시점으로 그날의 광주를 담는다. 만섭의 눈에 비친 광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시민들이 아무 이유없이 군인들에게 짓밟히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역사적 비극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의 인생 역시 변화하게 된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독일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3일간 영상 취재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는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된 광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한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에 대해서는 김사복이라는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영화는 이 의문의 택시기사를 평범한 소시민으로 상상한 뒤 그를 통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엿보는 구성을 택했다.
영화의 오프닝에는 공들여 재현한 서울 시내 모습이 삽입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인 국도극장에는 옛 한국영화 <춘자는 못말려>가 상영 중이다. 실제로 1980년 5월 16일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사회 계몽을 위해 기획된 영화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주인공 춘자와 <택시운전사> 속 만섭의 처지가 꽤 닮았다. 순박한 시골처녀 춘자는 서울로 상경해 가정부 일을 하는 등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의 참모습을 깨달아간다. 서울 사람 만섭 역시 광주로 내려가 절망 속에서 좌절하지 않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두 영화의 구성은 이처럼 엇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전자의 절망이 국가가 현실을 감추기 위해 포장한 절망이라면, 후자의 절망은 전자가 감춘 현실을 드러내는 절망이다. 그런 점에서 <택시운전사>는 <춘자는 못말려>에 대한 37년만의 대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택시운전사>의 중요한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영화는 역사적 비극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면서도 비장미보다는 익숙한 장르영화 형식으로 진행된다. 만섭과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는 버디무비의 주인공처럼 티격태격하고,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하는 순박한 청년 구재식(류준열)과 책임감 강한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은 주인공 주위를 맴돌며 웃기고 울리는 드라마를 담당한다. 또, 끊임없이 쫓아오는 사복조장(최귀화)과는 카체이싱 추격전까지 벌일 정도로 스릴러적 요소도 있다. 이러한 가벼운 분위기 속에 영화는 광주의 비극적 참상을 언뜻언뜻 삽입함으로써 충격 효과를 극대화한다.
지금까지 5.18 소재 영화는 대부분 시종일관 무거운 톤으로 희생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집중했다. 차마 표현하기 힘든 아픔을 미쳐버린 소녀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거나(<꽃잎>), 한 남자의 트라우마를 추적하거나(<박하사탕>), 시민군이 된 평범한 소시민의 저항을 슬픔 속에 재현하거나(<화려한 휴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야구를 통해 멀리 우회하거나(<스카우트>), 상상 속에서 복수하는(<26년>) 식이었다.
하지만 <택시운전사>는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제3의 관찰자 시점에서 현장을 엿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홀로코스트를 그린 영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소재와 장르로 만들어지고 있듯이 광주 민주화운동 역시 희생자를 이야기 주체로 놓는 한 가지 관점을 벗어나 다양한 시점으로 변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영화다.
마침 힌츠페터 역할을 맡은 토마스 크레취만은 <U-571>(2000), <피아니스트>(2002), <다운폴>(2004), <아이히만>(2007), <작전명 발키리>(2008), <스탈린그라드>(2013) 등 그동안 여러 장르의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에서 독일군 장교 역할을 맡아오던 배우라는 점에서 그가 광주 소재의 한국영화에서 첫 외부인이 됐다는 것도 의미있다.
그러나 광주를 향한 영화의 새로운 시각에 비해 스토리의 전형성은 못내 아쉽다. <의형제> <고지전> 등 내러티브를 짜는 데 장기를 발휘해온 장훈 감독은 이번엔 ‘착한 영화’ 콤플렉스에 빠진 듯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드라마를 구성했다. 만섭이 광주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행동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노래 부르며 정을 쌓고, 콩글리쉬로 소통하는 장면은 옛날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또 마지막 추격전은 극적 효과를 강조하느라 개연성이 떨어진다. 이런 가운데서도 송강호는 명불허전 연기로 허점들을 메워준다.
송강호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장면은 만섭이 홀로 광주를 빠져나와 순천에서 국수를 먹을 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시내 풍경과 왜곡보도하는 언론을 지켜보며 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키면서도 꾸역꾸역 면을 삼킨다.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결정적 순간을 그는 이토록 차분하게 표현한다.
광주에서와 달리 너무나 쉽게 서울의 딸과 통화할 수 있게 된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 더 늦을 거야. 광주에 손님을 두고 왔거든.”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아픈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적확하게 드러내주는 대사가 아닐까 싶다. 몇몇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명장면에 있다.
택시운전사 ★★★
새 사이드 미러를 달았지만 지나친 모범 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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