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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옵는 장충기 사장님!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몇 번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문자를 드립니다. 제 아들아이 OOO이 삼성전자 OO 부문에 지원을 했는데 결과 발표가 임박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 하반기에도 떨어졌는데 이번에 또 떨어지면 하반기에 다시 도전을 하겠다고 합니다만 올 하반기부터는 시험 과정과 방법도 바뀐다고 해서 이번에도 실패를 할까 봐 온 집안이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OOO 수험번호는 1OOOOOOO 번이고 OOO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같은 부탁이 무례한 줄 알면서도 부족한 자식을 둔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사장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와 은혜를 간절히 앙망하오며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문자를 드립니다. 사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면서까지 폐를 끼쳐드린 데 대해 용서를 빕니다. 모쪼록 더욱 건강하시고 섬기시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CBS OOOOOOO OOO 올림


ⓒ시사인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공개한 장충기 삼성전자 전 사장이 수신한 문자 중 일부입니다. 언론사 고위 간부, 기자, 검찰총장 등이 장 전 사장에게 각종 청탁을 늘어놓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평소 형님, 아우 하며 청탁을 주고받으며 살았을 그들의 '부당거래’를 직접 들여다본 것 같아 씁쓸해지는 문자입니다.


이 문자를 보면서 떠오른 영화가 있습니다. 8월 10일 개봉하는 루마니아 영화 <엘리자의 내일(Bacalaureat)>입니다. 영화에는 딸 시험 점수 올려달라고 고위 공직자에게 손 비비고, 새치기 않고 줄서서 기다리면 바보 취급 당하고,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고, 지난 번에 신세진 것 갚겠다면서 부정청탁을 가볍게 수락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로메오는 비교적 깨끗하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외과의사지만 그마저도 부정청탁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딸바보인 그의 소원은 딸이 하루 빨리 이 땅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희망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에게 루마니아는 새 출발하는 청년이 살 곳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딸은 영국 캠브리지 등 2곳의 대학에 합격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해야만 합격이 유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졸업시험 전날 딸이 강간미수 폭행사건을 당해 졸업시험을 못볼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로메오는 딸의 건강보다도 그녀가 유학을 못가는 것을 더 걱정합니다. 무조건 딸을 졸업시험에 합격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연줄이 닿는 고위 공직자에게 부정청탁을 합니다. 몇 단계를 거쳐 학교 교사를 만나게 된 그는 답안지 마지막 세 단어를 지우면 그것을 신호로 만점 답안지로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부정청탁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는 딸에게 이 계획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서 때론 결과가 더 중요해. 너에게 늘 정직하라고 가르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아."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말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딸은 아빠의 계획이 탐탁지 않습니다. 딸은 이미 우등생이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합격점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바심이 납니다. 혹시라도 합격점을 못받아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할까봐서요. 그래서 다시 딸에게 다그칩니다.


“여기서 10년만 살아봐. 어떻게 될지. 내가 너를 키우려고 얼마나 포기하고 살아왔는데.”


이쯤되면 로메오가 그동안 어떻게 존경받는 의사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워낙 더러운 꼴을 많이 봐서 자신은 잘못돼도 딸만은 이런 곳에서 키울 수 없다는 간절함의 발현이겠죠.



이 장면 뿐만이 아닙니다. 영화 속 루마니아는 그야말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또 그 부탁을 거절하면 나중에 도움받지 못할까봐 들어주며 살아갑니다. 줄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이유없는 차별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로메오에게는 내연녀(!)가 있는데 그 내연녀의 아들은 장애학교 입학 순번에 계속해서 밀립니다. 로메오는 내연녀와 아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여기선 순서를 지키다간 아무것도 못해!”


건조한 리얼리즘이 특기인 루마니아의 떠오르는 거장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은 차분하게 부정청탁이 만연한 루마니아 사회를 로메오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묘사합니다.




그동안 루마니아 하면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민중봉기로 총살시키고, 독재를 흉내낸 일리에스쿠의 시대도 정권교체로 마감하고, 최근엔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하는 국가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는 내부 사정을 잘 모른 채 멀리서 바라본 저의 막연한 착각이었나 봅니다. 영화 속 루마니아는 청렴함이나 투명함과는 거리가 먼 나라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오늘 저는 장충기 전 사장의 문자를 보면서 단지 이것이 먼 나라의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한국사회 역시 만만찮게 부정부패로 움직이는 곳이었죠. 오죽하면 공직자와 교사, 언론인들의 선물수수를 금지시키는 '김영란법'까지 만들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정화됐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아예 작정하고 들이대는 문자들을 보니 몰염치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해집니다. 이 문자들은 분명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영화 <엘리자의 내일>을 장 전 사장을 비롯해 대기업, 언론사, 검찰 등 어깨에 힘 주는 조직에서 힘 깨나 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좋겠습니다. 영화는 루마니아의 오늘을 통해 ‘엘리자의 내일’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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