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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돌아왔다. <달콤한 인생>에서 강렬한 명암 대비로 누아르를 시도하고,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으로 만주벌판에서 한국형 서부극을 개척한 김지운 감독이 할리우드로 떠난지 5년만에 총제작비 140억원의 대작으로 컴백했다.


그의 여덟번째 장편영화 <밀정>은 김 감독이 지금까지 매번 변화를 주며 시도했던 스타일 실험의 완결판 같은 작품이다. 장르 세공은 더 정교해졌고, 미장센과 사운드는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한국영화 대작들의 공식이나 다름없는 눈물샘 자극하는 소위 ‘신파’ 없이 오로지 영화의 스타일에 ‘올인’한 영화 <밀정>을 파헤쳐 보자.



누아르에 담긴 의문의 남자


<밀정>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를 배경으로, 아직도 의열단원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논란이 분분한 ‘황옥경부 사건’을 모티프로 재구성한 영화다. 황옥은 상하이에서 김시현과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원이 되기로 서약했지만 이후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이 일본경찰로서 비밀작전 수행이었다고 증언해 2년만에 석방된 인물이다. 영화에서 황옥은 이정출(송강호), 김시현은 김우진(공유), 김원봉은 정채산(이병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지운 감독은 <밀정>의 장르를 ‘차가운 누아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의 톤 앤 매너는 어둡고 채도가 낮은 블루톤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두뇌게임을 펼치는 첩보영화처럼 <밀정> 역시 감정 분출을 자제하며 이정출과 의열단원들의 심리전에 집중한다.



영화는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다.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리드미컬한 편집, 영상을 압도하는 음악은 시종일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지금까지 누구도 독립군 이야기를 이렇게 장르와 스타일 속에 가둔 적 없었다는 점에서 과감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영화다. 자칫하면 테크닉 과잉으로 스토리가 묻힐 수 있었지만 영화는 이를 잘 조절했다.



<암살>과 어떻게 다른가


<밀정>은 제작 단계부터 <암살>과 곧잘 비교됐다. <암살>에도 첩자를 뜻하는 밀정이 등장하고, 상하이 독립군이 경성으로 온다는 스토리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작년 <암살>이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밀정>은 향후 흥행성적에서도 <암살>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영화는 감독의 스타일 만큼 다르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한 사건을 위해 달려가는 캐릭터들의 다양한 특색을 조화시키는 데 능하다. 그래서 영화도 개성 강한 독립군들이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 집중했다. 반면 <밀정>의 김지운 감독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밀도 있게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다. 그래서 영화도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 간 내적 갈등을 중심에 놓고 이들이 합칠까 배신할까에 더 관심을 쏟는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왼쪽)과 <밀정>의 김지운 감독


두 영화의 제목처럼 <암살>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둔 영화라면, <밀정>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김원봉 캐릭터는 두 영화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는 터프가이처럼 멋지게 등장해 작전을 지휘하지만, <밀정>의 이병헌은 거대한 산 같은 느낌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이정출의 마음을 흔들어놓고는 사라진다. 이처럼 비슷한 소재라도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영화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고 이를 살펴보는 것은 영화를 감상하는 또다른 재미다.


<밀정>의 정채산(이병헌)


테마는 아이러니


<밀정>을 관통하는 테마는 ‘아이러니’다. 스토리와 스타일 모두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관객이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주인공 이정출은 한때 상하이 독립군이었으나 배신하고 일본 경찰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다시 의열단의 이중첩자가 돼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처럼 그의 인생 자체가 아이러니이기 때문인지 감독은 촬영 방식과 음악 등 각종 테크닉을 통해서도 아이러니한 상황을 자주 만드는데 이는 꽤 효과적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효과는 전혀 의외의 음악들이 클라이맥스에 사용돼 부조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재즈곡 'When you're smiling'은 독립군 학살이 벌어지는 장면에 반어적으로 등장하고, 영화 <세가지 색: 레드>의 테마곡으로도 쓰인 라벨의 아름다운 볼레로 선율은 역설적이게도 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며, 엔딩 크레딧에는 감미로운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이 쓰였다.




영화의 스토리와 정반대인 음악이 노리는 효과는 명백하다. 에릭 클랩튼의 피아노 버전 ‘Layla’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연쇄살인 행각이 벌어지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좋은 친구들>, 그리고 결정적인 핵폭발 장면에서 베라 린의 경쾌한 ‘We’ll meet again’을 삽입한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어울리지 않는 음악을 통해 장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다.


<밀정>은 첩보 누아르 장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로 생과 사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 선조들이다. 위에 열거한 <밀정>에 쓰인 음악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세 곡 모두 영화의 배경과 동시대인 1920년대에 발표된 곡들이라는 것이다. 의열단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을 위해 첩보전을 벌이던 와중에 지구촌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곡들이 만들어졌고 영화는 이를 동시에 배치해 관객이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영화는 이처럼 기발한 음악 사용과 화려한 테크닉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선조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대사나 감정선으로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더라도, 세련된 스타일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밀정>은 증명하고 있다.



송강호와 공유, 그리고 츠루미 신고


<밀정>은 천만 영화 단골배우인 송강호가 <사도>(2014) 이후 2년 만에 출연한 영화다. 김지운 감독과는 네 번째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이병헌 역시 김 감독 영화 4편에 출연했다.


배우들 뿐만 아니라 촬영 김지용, 음악 모그, 미술 조화성, 무술 정두홍 등 김지운 사단이라고 할 정도로 꾸준하게 함께 작업해온 스태프들이 이번에도 뭉쳤다. 김지운 감독은 매번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면서도 익숙한 배우, 스태프들과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콘텐츠가 새로울수록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 역시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가 정해져 있는 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송강호는 이번에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바람 불면 추운 게 당연하듯 송강호는 연기를 못해야만 뉴스가 될 배우다. 이번에도 어느 편에 설까 갈등하는 이정출의 모습을 표정으로 드러내는데 특히 법정 진술 장면이 압권이다.


‘부산행’ KTX에 이어 이번엔 경성행 기차에 오른 공유는 특유의 부드러운 인상이 장점이자 단점인 배우다. 이정출을 형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갈 때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반면, 의열단 리더로서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는 자꾸만 김우진이 아닌 (커피광고에서 스카프를 맨) 공유가 튀어나와 몰입을 방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유의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분명한데 특히 연계순(한지민)의 사진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서의 표정 연기가 좋다.


츠루미 신고와 송강호


이정출의 보스이자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인 히가시 역은 츠루미 신고가 맡았다. 츠루미는 40년 경력의 명배우로 <마이웨이>를 통해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었는데 <밀정>에서 이정출과 보여주는 두 사람의 케미는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와 강사장(김영철)의 관계를 연상시킬만큼 흥미롭다.


또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서영주 등이 출연하는데 한지민은 강단 있는 모습이 새롭고, 엄태구는 따귀 때리는 장면의 표정이 오버스럽지만 강렬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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