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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함께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페인 앤 글로리'(5일 개봉)는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1번째 영화다. 작년 세계 유수의 영화상을 휩쓴 멕시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처럼 이 영화도 감독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페인 거장 알모도바르 감독의 유년기 회고
영화는 빨래터에서 빨래하며 수다 떨고 노래하는 4명의 여인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잠시 후 밝혀지지만 넷 중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여성이 주인공의 어머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다. 영화는 60대가 된 영화감독 살바도르 마요(안토니오 반데라스)의 현재와 그가 유년기에 겪었던 엄마와의 일화, 남몰래 열병을 앓았던 첫사랑 등을 번갈아 보여주며 전개된다.
현재의 마요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영상자료원에서 자신의 32년 전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해 상영하는데 관객과 대화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마요는 주연배우였던 알베르토(아시에르 엑센디아)와 함께 갈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그에게 큰 용기다. 젊은 시절 마요는 알베르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싸웠고 이후 연락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화해하지만 헤로인을 놓고 또 충돌한다.
영화의 제목인 '페인'은 글자 그대로 통증을 뜻한다. 마요는 온갖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 인두염, 귓병, 역류, 궤양, 천식, 신경통, 근육통을 앓고 있고 요추, 등뼈, 무릎도 아프다. 목이 자주 막혀 물을 마실 때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또 만성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는 통증이 고통이자 창작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영화감독으로서의 영광을 한꺼풀 벗겨내면 잠복돼 있던 온갖 고통이 튀어나온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집에서 유명세를 누리는 것 같지만 내면은 온통 멍들어 은둔하며 살고 있다.
영화에서 마요가 자주 회상하는 인물은 그의 엄마다. 어릴적부터 몽상가였던 그와 달리 엄마는 매우 현실적인 여자였다. 생전의 엄마는 "네가 잘된 것은 내가 너를 뒷바라지 하느라 희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엄마가 자신을 "기대에 못 미친 아들"이라고 말했던 것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그에게 엄마는 창작의 자양분이지만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나오는 것이 못마땅해 넣지 말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향은 다르지만 모자관계는 두 사람의 감정을 애틋하게 만든다. 엄마는 수의를 점검하며 아들에게 관에 들어갈 땐 꼭 맨발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글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던 마요가 '작가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계기는 엄마를 통해 회상한 어릴적 첫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온다. 동굴 속 집에 그림 장식을 해주기 위해 찾아온 청년 에두아르도(세사르 빈센테)에게 느낀 강렬한 욕망으로 인해 그는 성에 눈을 뜬다. 또 수십년 만에 재회한 동성연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와의 키스는 새로운 자극이 되어준다.
영화는 동성애자로 태어나 영화감독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유년시절과 사랑의 아픔에 대한 회고록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주인공 마요에게 실제 영화를 만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을 대입해야만 더 뭉클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극중 영화감독 마요을 연기한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이번이 무려 9번째 출연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고 감독의 엄마 하신타로 분한 페넬로페 크루즈는 7번째 공동 작업으로 여성적 감수성이 풍부한 알도모바르에게 여성 페르소나가 되어주었다.
젊은 시절 알모도바르는 도착적 성을 소재로 권위를 조롱하는 영상을 자유자재로 펼쳐놓아 주목받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온갖 변태적 상상력을 담아내 페미니즘 진영에서 공격을 받은 그는 스릴러와 멜로드라마 장르의 이종융합 실험을 거쳐 40대 후반이 되면서 보편적 인간 감수성을 섬세하게 포착한 성숙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비밀의 꽃'(1995)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등은 그의 대표작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사랑과 고통의 드라마를 아름답게 그려 칸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이후엔 섹슈얼리티에 히치콕적 서스펜스를 결합하는 실험과 가족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담는 멜로드라마를 오가고 있다. 원색의 강렬한 색감 속에 펼쳐지는 성과 욕망, 종교에 관한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가 알모도바르 영화의 특징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페인 앤 글로리'는 고통과 영광의 시절을 거쳐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은 71세 노감독의 자가진단 심리 보고서다. 영화가 곧 인생이어서 그동안 영화를 통해 내면을 분출해온 한 예술가는 자전적인 이야기와 허구가 뒤섞인 '팩션'을 통해 고통 투성이인 그의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마지막 장면에선 그에게 삶의 전부였던 영화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영화는 작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기생충'과 경쟁을 펼치고 있다. 칸영화제에선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작년 12월 8일 열린 LA비평가협회상에선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는데 이때 '기생충'은 작품상을 받았다. 1월 5일 열린 골든글로브에선 '기생충'에 외국어영화상을 내줬지만 1월 25일 열린 스페인 고야상 시상식에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편집상, 음악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다. 2월 2일 열리는 영국 아카데미와 9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도 '기생충'과 함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페인 앤 글로리 ★★★★
사랑보다 더 고통스럽고 창작욕을 자극하는 건 없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20/02/27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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