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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1억2천만 파운드라고 하지 않았나?”
“이젠 2천만 파운드야. 시나리오 가격이 왜 급격히 올랐냐고?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로 만들면 돈이 더 될 테니까.”
영화는 사설탐정 플레처(휴 그랜트)가 마약 판매상 보스의 오른팔 레이먼드(찰리 허냄)를 찾아가 재치있게 협박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플레처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라며 그동안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레이먼드에게 들려준다. 영화는 플레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액자 구성으로 전개된다.
작년 ‘알라딘’ 실사판 영화로 호평받은 가이 리치 감독이 신작 ‘젠틀맨’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셜록 홈즈’ ‘킹 아서’ 등 영국 영웅들을 매끈한 프랜차이즈 영화 속 히어로로 재탄생시켜온 리치는 이번 영화에선 20년 전 데뷔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갔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 이하 ‘록 스탁’) ‘스내치’(2000) 등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들은 터프가이들의 앙상블 캐스트, 스타일리시한 화면, 허를 찌르는 전개와 속도감 있는 편집 등으로 당시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젠틀맨’은 그때 그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이 리치 감독
가이 리치의 데뷔작을 떠올리게 하는 ‘젠틀맨’
리치는 1998년 '록 스탁'을 내놓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영국 박스오피스를 휩쓴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 대니 보일에 이은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이며 영화계 신성의 등장을 알렸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영국 감독 샘 멘데스, 크리스토퍼 놀란, 톰 후퍼, 에드가 라이트, 셰인 메도우스, 가스 제닝스 등과 달리 그는 영화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적 없이 단지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감독이 됐다는 점에서 타란티노와 비슷하다.
리치는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광고회사 중역이었고 어머니는 왕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서 장애를 앓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15세에 마약 복용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기도 했는데 이 시절의 거친 경험이 이후 그가 만든 영화들 속에 녹아 있다. 그는 성인이 된 뒤 상업광고를 찍다가 틈틈이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이것이 호평받자 장편영화로 완성하며 데뷔했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갱스터 영화인 ‘록 스탁’은 험상궂은 인상의 신인 배우들을 대거 기용해 진짜 폭력배들이 출연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받았는데 다이빙 선수 출신의 제이슨 스테이덤과 축구 선수 출신의 비니 존스는 이후 스타로 거듭나 제2 인생을 살게 됐다.
두 번째 영화 '스내치'는 도박권투와 훔친 다이아몬드를 소재로 한 범죄 코미디로 베네치오 델 토로, 브래드 피트 등 톱스타들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리치는 2000년 팝스타 마돈나와 결혼하며 세기의 인물이 되었으나 마돈나를 배우로 기용해 만든 '스웹트 어웨이'(2002)와 프랑스의 뤽 베송과 합작한 '리볼버'(2005) 등 연이은 흥행 참패로 고전했다. 하지만 이후 슈퍼히어로 붐에 셜록 홈즈를 할리우드로 끌어들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2009)가 제작비 대비 6배 가까운 수입을 거둬들이며 재기에 성공한다.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영상미학을 첩보물에 접목한 '맨 프롬 UNCLE'(2015)은 비록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마니아를 양산했고,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선택인 '알라딘'은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리치 감독이 온가족이 보는 영화도 잘 만든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젠틀맨'은 데뷔 20년이 지난 그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장르인 앙상블 갱스터 범죄 코미디로 돌아온 영화다.
재치있는 대사와 예측불허 전개 ‘젠틀맨’
‘젠틀맨’이라는 제목은 매튜 본 감독의 영국 프랜차이즈 영화 ‘킹스맨’을 연상시킨다. 포스터의 느낌도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킹스맨 콜린 퍼스같은 젠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 과격하고 무자비하다. 원래 젠틀맨이라는 단어가 재력과 학식을 갖춘 영국 귀족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화 속에서 돈 자랑하며 유식한 말을 늘어놓는 남자들을 젠틀맨이라고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치의 영화인만큼 영화를 볼땐 도덕적인 젠틀함에 대한 강박관념은 잠시 접어두는 게 좋다.
매튜 매커너히, 휴 그랜트, 찰리 허냄, 콜린 파렐, 헨리 골딩 등 호화 캐스팅으로 꾸려진 젠틀맨들은 화려한 입담으로 기싸움을 벌이다가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고 급습한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재치있는 대사들과 경쾌한 편집, 예측불허 초스피드 전개가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주요 등장인물들을 파악하고 가기를 권한다. 초반부터 정신없이 인물 소개가 이어져 잠시라도 한눈 팔다간 맥락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쯤 되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정리되긴 하지만 캐릭터들에 대해 알고 있으면 초반 인물들이 내뱉는 영국식 유머로 점철된 말맛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는 크게 네 가지 인물군이 있다. 마약계 대부 미키 피어슨(매튜 매커너히)과 그의 아내(미셸 도커리), 사설탐정 플레처(휴 그랜트)와 미키의 오른팔 레이먼드(찰리 허냄), 아마추어 이종격투기 선수들과 코치(콜린 퍼스), 중국계 갱스터 드라이 아이(헨리 골딩)와 그의 보스 조지 등이다. 이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가 전환에 전환을 거듭한다.
영화는 미키 피어슨이 은퇴하기 위해 마약농장을 정리하려는데서 시작한다. 그는 미국의 거부 매튜 버거(제레미 스트롱)에게 농장 6곳을 4억달러에 넘기는 협상을 하는 중이다. 타블로이드지 편집장 빅 데이브(에디 마산)는 미키가 왕족 가문의 마약중독자 딸과 연관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플레처에게 뒷조사를 맡긴다. 플레처는 미키를 쫓다가 더 큰 건을 포착하고 협박하기 위해 미키의 오른팔 레이먼드를 찾아간다. 영화 내내 플레처와 레이먼드는 불꽃 튀는 입담 대결을 펼친다.
미키가 은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드라이 아이(헨리 골딩)는 호시탐탐 미키를 노린다. 미키는 자신의 농장 하나가 아마추어 이종격투기 선수들에게 털렸다는 소식을 듣고 배후를 캐는데 이 선수들을 관리하는 코치(콜린 퍼스)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레이먼드를 찾아간다. 그렇게 네 가지 인물군의 연결고리가 완성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전개,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내뿜는 긴장감, 복잡했던 이야기가 하나로 맞춰지는 짜릿함, 무겁지 않은 경쾌한 범죄 코미디를 찾는 관객이라면 '젠틀맨'에 만족할 것이다.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배우들의 연기 변신이다. 휴 그랜트는 현란한 말솜씨로 돈을 뜯어내려는 사설탐정으로 분해 로맨틱 가이였던 그가 정말 맞는지 한동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리치 감독의 '킹 아서: 제왕의 검'에서 엑스칼리버를 뽑아 든 아서왕이었던 찰리 허냄은 이번엔 묵묵히 미키의 수발을 들다가 결정적 순간에만 해결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비한 동물사전' '더 랍스터' '토탈 리콜' 등에서 진중한 연기를 선보여온 콜린 퍼스는 떠뜰썩하고 의리 있는 코치로 변신해 영화에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 2018년 할리우드에 아시아 바람을 몰고온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부잣집 아들 역할을 맡아 주목받은 말레이시아계 배우 헨리 골딩은 이번엔 성격 급한 중간보스로 분해 망가진 모습도 불사한다. 26일 개봉.
젠틀맨 ★★★☆
앙상블 갱스터 범죄 코미디로 돌아온 가이 리치.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20/02/27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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