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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당시 실제 인물, 사건과 비교


한국 현대사에서 10.26은 특이한 사건이다. 분명 역사의 흐름을 바꾼 분기점인데 그것이 민중 봉기나 군사 쿠데타 같은 어떤 집단이 아니라 단 한 사람, 그것도 독재자의 측근에 의해 이뤄졌고, 사건의 결과 또하나의 모방 독재자가 어부지리를 얻는 것으로 마무리됐다는 점에서 규정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지난 수십년간 배신자에서 투사를 넘나들었다.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은 10.26의 모호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블랙코미디였다. 윤여정이 ‘철딱써니 없는’ 청와대 사람들을 비웃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된 영화는 좌충우돌하던 중앙정보부 김부장이 ‘홧김’에 '각하'를 해치우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그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병헌)


그로부터 15년 후 한국 권력자들의 병폐를 까발린 ‘내부자들’(2015)을 만들었던 우민호 감독이 다시 그린 10.26은 임상수 감독의 영화보다 훨씬 정교하게 이 사건을 조명한다. 1990년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현 가천대 교수)가 연재한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라는 인물이 10.26 이전 40일 동안 겪은 행적과 심리 변화를 파고들어 그가 어떤 동기로 왜 대통령을 저격했는지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한다.


전작들과 달리 웃음기를 걷어내고 매우 진지하게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는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한 열등감,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후배에 대한 분노, 보스가 되고 싶은 욕망 등 한 남자의 복합적 심리를 이병헌의 눈부신 연기를 통해 전달하는데 중점을 둔다. 정치 실화를 다뤘다는 점에서 정치스릴러 장르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보스를 정점에 놓고 두 충직스런 부하의 대결이 폭력배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갱스터 영화의 쾌감도 곳곳에 묻어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박용각 전 중앙정보부장(곽도원)


프레이저 청문회가 출발점


영화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프레이저 청문회로 시작한다. 프레이저 청문회는 실제로는 1977년 6월 열렸지만 영화에선 시간을 압축해 1979년으로 설정했다.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린 이유는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가 한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영화에선 데보라 심)을 통해 미국 관료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폭로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정계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미국 하원은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 도널드 M. 프레이저 위원장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부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청문회가 열렸다(프레이저 위원회는 2년 후 박정희 집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한국정치와 경제를 상세히 기록한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를 발간한다). 박정희 집권 후 ‘공포의 삼겹살’로 불릴 정도로 친위대를 자처하던 오른팔이었다가 유신 이후 토사구팽 당해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한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에게 주어진 첫 임무가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것이었던만큼 김재규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는데 있어 김형욱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영화에서 김형욱은 박용각이라는 인물로 등장하고 곽도원이 연기한다. ‘남산의 부장들’이 복수형 제목인 만큼 박용각은 김재규를 모델로 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과 함께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박용각이 회고록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통(이성민)은 격분한다. 김규평은 회고록 원고를 회수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가 박용각을 만난다. 박용각은 김규평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더 이상 박통을 믿지 않아. 다음을 준비하고 있어. 한국에서 자네를 만날 거라던데?”


이제 김규평은 만약 박통이 사라지면 혹시 자신이 다음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영웅심리와 박통에게 충성하기 위해선 박용각을 제거해야 한다는 두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초조할 때마다 머리를 매만지는 이병헌의 세심한 연기는 관객이 김규평의 심리에 집중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박통(이성민)


반역을 꾀한 두 부장들의 운명


박용각과 김규평은 모두 반역을 꾀하다가 죽는다. 한 사람은 반역을 떠들다가 죽고 한 사람은 반역을 실제 행한 뒤 죽는다. 김규평이 자신을 통해 반역을 꾀하려던 친구를 죽인 뒤 반역을 행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된 측면이 있는데 이는 그만큼 10.26이 철저히 계획된 사건이라기보다는 개인적 복수심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 박용각은 김규평에게 오셀로의 ‘이아고’를 언급한다.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이아고는 오셀로의 총애를 받는 카시오를 질투해 계략을 꾸민 인물이다. 이아고의 계략은 오셀로가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피바람을 몰고 온다. 영화 속에서 김규평은 박통에게 이아고의 존재를 묻지만 정작 자신이 박통에게 이아고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아고에게 질투의 대상인 카시오는 영화 속에서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이다. 그는 아부의 달인으로 박통이 직접 나서기 껄끄러워하는 일을 대신해주며 막강한 문고리권력 행세를 한다.


실제로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박정희의 일방적 총애를 받는 차지철을 그는 ‘버러지 같은 자식’이라고 불렀다. 10.26 당시에도 가장 먼저 쏴죽인 사람이 차지철일 정도다.


두 사람의 악연은 10년 전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고 차지철이 국회의원이던 시절부터 계속됐다. 비둘기파인 김재규와 매파인 차지철은 3선 개헌을 설득해가며 할지 밀어붙일지를 놓고 삿대질을 하며 싸웠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의 측근이 된 뒤엔 충성경쟁에 열을 올렸지만 김재규는 번번이 밀렸다. 1978년부터는 박통이 차지철하고만 독대하는 시간이 늘었다. 차지철의 권력은 막강해졌지만 경호실은 상대적으로 작은 조직이었으므로 그는 비공식적으로 여러 조직을 가동했다. 영화에는 중정 요원까지 경호실장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곽상천 경호실장(이희준)


김형욱 살인사건 재구성


영화에서 눈여겨볼 장면 중 하나는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김형욱 살인사건의 재현이다. 또하나의 ‘남산의 부장’인 박용각은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돼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장면이 김규평과 곽상천의 권력게임과 연계되며 매우 긴박하게 그려진다.


김형욱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설들이 있었다. 중정 요원이 파리 카지노에서 유인해 마취시킨 뒤 국내 압송해 박정희가 직접 쏘아 죽였다는 설,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살해한 뒤 시신을 닭모이 분쇄기에 갈아버렸다는 설, 주프랑스 대사관에서 살해해 수장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2004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가 충직한 부하이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했고 이상열은 신뢰할 만한 직원을 통해 동유럽인 2인을 매수해 파리 근교에서 권총 살해했다는 진술을 받아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이 가설들을 짜맞춰 하나로 묶어버렸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위에 제시한 가설들이 조금씩 녹아 있다. 특히 양계장 분쇄기설은 한국 컬트영화의 대부 김기영 감독이 영화 ‘화녀 82’(1982)를 만들 때 당시 떠돌던 이야기를 직접 소재로 가져다 쓴 적 있어 더 주목받아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이병헌)과 박용각(곽도원)


박용각을 처리함으로써 김규평은 박통에게 재신임을 얻고자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친구를 죽인 배신자”라는 오명이었다. 박통은 계속해서 곽상천만 불러 술을 마신다. 초조해진 김규평은 안가에 몰래 잠입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박통의 대화를 도청한다. 박통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임자 알아서 해”라고 지시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에게 박용각 처리를 맡길 때 한 말과 똑같은 말이다. 질투에 눈 먼 이아고였던 김규평은 이제 카이사르를 죽인 부르투스가 되어 왕을 직접 겨누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처리한 박용각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언제 자신에게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작용하자 숨겨왔던 영웅심리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김규평이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총을 꺼낸 동기가 완성된다. 하지만 김규평의 혁명은 이후 방향을 잘못 돌리는 바람에 몇 시간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김재규에 대해 역사학자 한홍구는 이렇게 썼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제상에 바칠 제물로 김형욱을 준비했다. 그것이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마지막 충성이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병헌)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술자리 한복판에서 2인자가 권력자의 심장에 총구를 겨눠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10.26 사건을 꼼꼼하게 재현한 스릴러다. 모두가 사건의 경과를 알고 있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쌓인 이 사건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차분히 추적해간다.


개봉 전엔 편집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완성된 작품은 논란를 불식시킬 만한 수작이다. 이병헌, 곽도원, 이성민, 이희준 등 주요 배역을 비롯해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로비스트 데보라 심 역할의 김소진, 전두환을 간결하게 연기한 서현우 등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좋고, 인물의 심리에 몰입하게 만드는 연출도 훌륭하다.


남산의 부장들 ★★★★

차분하고 섬세한 웰메이드 정치스릴러.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20/01/27614/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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