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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아이디어가 온세상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곳곳에서 회의와 컨퍼런스, 세미나, 미팅이 열리고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하지만 아이디어들은 곧잘 산화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의 거품과 함께 사라진다. 아이디어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재빠르게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사람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하나의 키워드로 곧장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일까?


당신이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정리한다고 치자. 모든 아이디어를 글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때로는 그림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그림으로 소통해왔다. 맹수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경고하거나 용맹한 선조를 찬양하기 위해 동굴에 그림을 남겼다. 문자가 발명된 뒤 의사소통은 대부분 글로 이루어지지만 글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용돼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그림의 중요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것이 최근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 각광받는 이유다.



2009년 영국 플리머스대학교의 심리학자 재키 앤드레이드는 4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지루한 보이스 메일 메시지를 150초 동안 들려주면서 절반은 낙서(두들)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듣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낙서하면서 들은 사람의 집중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29% 더 높았던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 명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결과는 쓸모없는 일인 줄 알았던 낙서(두들)의 순기능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두들 레볼루션'의 시작이다.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정리할 필요성과 소통에서 그림과 낙서의 중요성이 결합해 탄생한 분야가 바로 ‘그래픽 레코딩’이다. 회의나 컨퍼런스 등에서 대화 내용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래픽 레코딩’은 40여년 전 탄생했지만, 최근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단의 필요성이 늘어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마르쿠스 엔젤베르거는 6년 전 그래픽 레코딩을 처음 접한 뒤 매료돼 이 분야에 몰두해 왔다. 2015년 크리에이티브 트라이브(Creative Tribe)라는 회사를 창업한 뒤 유럽, 두바이, 우간다 등 전세계를 누비면서 그래픽 레코더로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를 세계 첫 ‘비주얼 촉매사(Visual Catalyst)’라고 부르는 그는 시각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생각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지난 11일 제19회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은 엔젤베르거 대표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포럼에서 연사의 발표 내용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낸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그래픽 레코딩은 다양하게 듣기, 빠르게 생각하기, 실행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며 그중 ‘듣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마르쿠스 엔젤베르거 크리에이티브 트라이브 대표 인터뷰


Q 그래픽 레코딩이란 무엇인가요?

A 컨퍼런스, 회의, 이벤트 등에 참가해서 집중해서 듣고 관찰하고, 내용을 실시간으로 그래픽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Q 듣는 내용을 기억하면서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나요?

A 저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 괜찮아요(웃음). 저는 하루에 6~8시간을 그려요. 지난 6년 동안 해왔어요. (그림을 가리키며) 처음에는 이런 그림이 아니었어요. 피아노를 처음 배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엔 간단한 멜로디만 치겠죠. 몇 년이 지나면서 숙달되면 모차르트나 바흐를 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Q 그래픽 레코딩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지나요?

A 제 작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듣기예요. 듣기에는 네 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는 다운로드. 회의에서 다음에 뭐가 나올지 생각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을 머릿속에 다운로드 하는 거죠. 두 번째는 팩트 찾기. 자신을 녹음기나 비디오라고 생각하고 팩트만을 찾아내야 해요. 세 번째는 강조. 지금 어떤 컨텍스트에 있고 어떤 환경에 있는지 감안해서 그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강조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생성. 인터랙티브 혹은 디자인 씽킹에서 유용한 방법인데요. 기존의 가정을 가급적 다 버리고 최대한의 공통점을 키워드로 뽑아내는 거죠.


Q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복잡하네요. 들은 뒤에는 어떻게 하나요?

A 그 다음 과정은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예요. 머릿속을 빠르게 스캔해 점과 점을 연결해야 해요. 연사가 말하는 것에 뭘 추가할 수 있을지 빅 픽처를 보고 관점을 부여해야 하죠. 아주 작은 부분을 그릴 때에도 전체 그림을 생각해야 합니다.


Q 그릴 내용을 머릿속에 구체화하는 거군요. 그 다음은요?

A 이제 실행이죠. 선, 원, 네모, 세모 이것만 있으면 모든 형체를 다 그릴 수 있어요. 자동차, 나무, 사람, 사자 모두 이 도형의 변형이에요. 그리는 중에도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돼요. 모든 정보를 다른 레벨로 받아들이고 이 상태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Q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겠군요.

A 맞아요. 그래픽 레코딩은 익스트림 스포츠 같아요. 무대 근처에서 압박을 받으면서 의뢰인이 원하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요. 정말 힘들어요.


Q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두가 수용할 만한 그림을 그린다는 건 굉장한 압박이겠어요.

A 컨퍼런스에서 펜을 들면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감돌죠. 하지만 그 순간 펜을 든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돼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신용이 올라가죠. 당신이 펜을 들고 무엇을 그리려고 하면 사람들은 당신의 펜을 바라볼 거예요.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기 바빴던 사람도 그때만큼은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당신의 펜 끝에 집중할 거예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거죠.



Q 완성된 그림은 어떻게 쓰이나요?

A 회의 중에 또 회의가 끝난 후에도 많은 용도가 있어요. 무엇보다 참가자들이 내용을 기억하는 도구가 되겠죠. 노트에 필기하는 것은 단지 그뿐이지만 이 그림을 동료,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당신이 들은 것을 금세 설명할 수 있거든요. 완전히 다른 레벨인 거죠. 또 이 그림은 집단지성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자신이 전체 과정에서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이 그림을 통해 알게 돼요. 이를 바탕으로 다음 회의를 준비할 수 있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사진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올리면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퍼지게 될테니 홍보 효과도 있습니다(웃음).



Q 누구나 당신처럼 그래픽 레코더가 될 수 있나요?

A 아뇨(웃음). 동시에 네(웃음). 누구나 100미터 달리기를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대답은 “네,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겠지만 정말 열정이 있어야 해요. 기술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림 그릴 줄 몰라도 돼요. 진짜예요. 실시간 노트 필기, 글과 그림을 조화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듣기를 전혀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에겐 정보가 한쪽 귀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다른쪽 귀로 나가요(웃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말 주의 깊게 들어야 해요. 그러면서 빅 아이디어를 찾아야 해요. 뭐가 빅 아이디어인지는 듣는 당신에게 달렸죠. 저는 제게 작업을 맡긴 의뢰인에게 항상 설명해 줍니다. 왜 제가 이 아이디어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를요.



Q 당신은 예술가인가요?

A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린 건 예술작품이 아닌 작업 문서이고 목적이 있는 그림이에요. 저는 단지 멋지게 보이거나 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지 않아요. 제가 저를 예술가라고 해버리면 높은 진입장벽을 쌓게 되는 거죠. 하지만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래픽 레코딩을 권하고 싶거든요. 그러니 저는 저를 예술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순전히 의뢰인을 위한 가치를 창출해요. 이런 사람을 예술가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나요?



Q 하지만 저는 당신이 예술가처럼 보여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예술가라고 할까요?

A 저는 컨퍼런스를 옮겨다니면서 멋진 그림 그려주는 광대처럼 보이기는 싫어요. 저는 여러 세대, 여러 문화와 국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창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 있어요.


저는 사자든 용이든 뭐든 그리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시각화하는 컨셉트 자체예요. 우정, 리더십, 사랑, 대혼란 등등이요.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이 사랑의 상징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다양한 그림이 나오겠죠. 어떤 것은 비슷하고 또 어떤 것은 다를 거예요. 여기서 이 작업의 아름다움이 시작돼요. 비교하다 보면 갑자기 은연중의 지식이 명백해지니까요. 사람들은 그걸 그림을 통해 실제로 느낄 수 있게 돼요.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집어 넣는 것처럼 상호간의 이해가 강화되는 거죠.


Q 그래픽 레코딩은 누구에게 필요할까요?

A 소통이 필요한 조직에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 일상의 소통에선 정말 많은 오해가 발생해요. 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과정은 의도대로 되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그림은 상호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해요. 그림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해요. 왜냐하면 그림은 미래를 직접 보여주니까요. 리더나 컨설턴트라면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직원에게 보여주고, 직원들은 우리가 가야할 곳이 저기구나 알게 되니 동기부여가 되겠죠.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3705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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