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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의 해리는 에그시에게 <귀여운 여인>을 봤냐고 물어봅니다. 하류계층 여자가 부유한 상류계층 남자에게 훈육되어 숙녀가 되는 줄리아 로버츠, 리차드 기어 주연의 영화죠. 이에 에그시는 <마이 페어 레이디>를 봤다고 대답합니다. 두 영화의 차이는 전자가 미국 배경, 후자는 영국 배경의 영화라는 것이죠. <킹스맨>이 영국영화니 <마이 페어 레이디>에 우호적인 것은 당연하겠고요. 1964년 조지 쿠커 감독, 오드리 헵번, 렉스 해리슨 주연의 <마이 페어 레이디>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요?


우선 영어사전에서 'Fair'의 뜻부터 살펴봤습니다. '공정한/타당한', '괜찮은/맑은'이란 뜻이 있고, 피부색을 말할 때 '금발의 하얀 피부'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문예식 표현으로 '예쁜'이란 뜻도 있네요. 결국 'My Fair Lady'란 여러 가지 조합으로 해석 가능한 제목입니다. 공정한 아가씨, 괜찮은 아가씨, 금발 아가씨, 예쁜 아가씨 등등이죠. 한국에선 곧잘 '요조숙녀'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가지 뜻으로만 생각하는 건 경계해야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원작이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피그말리온]에 대해서 좀더 살펴볼까요?


그리스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키프러스 섬의 조각가 이름입니다. 섬의 여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상으로 만듭니다. 아프로디테가 그 조각상을 진짜 여자로 만들어 주는데 그녀의 이름은 갈라테이아입니다. 자신이 만든 이상형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피그말리온은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와 곧바로 결혼해 파포스라는 아이를 낳습니다. 이러한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파생한 말이 '피그말리온 효과'인데 이는 사람에 대해 원하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긍정적 효과를 뜻하는 말입니다.


버나드 쇼는 1913년 피그말리온 신화를 영국을 배경으로 옮겨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만들어가는 음성학자 이야기로 희곡을 썼습니다. 연극은 큰 인기를 얻었고, 1938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1964년 작품의 원작인 또다른 <마이 페어 레이디>입니다. 이 연극으로 버나드 쇼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죠. 버나드 쇼의 원작에선 'Fair'의 다양한 뜻을 골고루 느낄 수 있습니다. 금발의 피부가 하얗고 예쁜 여자는 남자의 교육을 통해 자기 주장이 명확한 여자로 거듭나지만 결국 스스로 독립된 존재임을 깨닫고 결혼을 거부합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1956년 알란 제이 러너와 프레데릭 로우에 의해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재탄생합니다. 뮤지컬은 7년 동안 2700회 공연될 정도로 대히트했습니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뮤지컬의 영화화 판권을 사들였고, 이렇게 해서 1964년 아카데미 영화상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무려 10개 부문을 싹쓸이한 할리우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선 대흥행을 했지만 영국에선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별로 흥행하지 못했네요.


버나드 쇼는 애초 헨리 히긴스와 일라이저 두리틀이 결혼하지 않는 엔딩을 썼지만 뮤지컬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렉스 해리슨과 줄리 앤드류스였는데 워너 브라더스는 할리우드에서 무명이던 줄리 앤드류스 대신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캐스팅했습니다. 하지만 이 캐스팅은 두고두고 구설에 오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일라이저는 곧 줄리 앤드류스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파인지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배제되며 이 영화 이후 내리막을 걸은 반면, 줄리 앤드류스는 그해 <메리 포핀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고 이듬해 <사운드 오브 뮤직>에 출연하며 대스타로 올라섭니다.


자, 여기까진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였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가 만들어진지 벌써 51년이 지났습니다. 장장 2시간 50분에 걸친 (무려 인터미션도 포함된)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떠올린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겠습니다.



1. 인공지능에 대한 로맨틱한 우화


피그말리온 신화는 인공지능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일라이저 둘리틀은 영혼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공기처럼 두둥실 떠다닙니다. 조각상 갈라테이아에서 모티프를 따왔으니 더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상류층의 언어를 습득한 뒤 그녀는 신비의 묘약을 먹은 소녀처럼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트랜슬베니아 왕자와 춤을 춥니다. 온갖 여성 비하를 견디면서도 꿋꿋하게 그녀에게 예절을 가르쳐준 헨리 히긴스 교수에게 찾아와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현대의 어느 로봇 회사도 이렇게 매력적이고 말 잘듣는 로봇을 만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그녀는 정말 로봇 같습니다. 특히 드레스를 입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장면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라서 그녀가 우리와 똑같이 숨 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인공지능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 지망생이 있다면 필히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일라이저 둘리틀 캐릭터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요즘 '머신 러닝'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는데 그녀가 상류층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역시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머신 러닝을 닮았습니다.



2. 계급사회에서 만들어진 신데렐라


<마이 페어 레이디>엔 세 개의 계층이 나옵니다. 하류층, 중산층, 상류층입니다. 꽃 파는 일라이저는 하류층, 32개 국어를 구사하는 음성학자 헨리 히긴스는 상류층, 그리고 일라이저의 아버지 알프레드 둘리틀은 헨리의 도움으로 하류층에서 중산층으로 올라섭니다.


영화에는 알프레드가 노래 부르는 장면이 한 번 나옵니다. 결혼식을 앞둔 전날 술집에서 그는 사람들과 함께 춤 추며 노래합니다. 결혼을 앞둔 그의 모습은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 구걸하고 다닐 때가 더 좋았다고요. 지금은 아는 사람은 많지만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 뿐이라 진실한 관계를 맺기 힘들다고요. 보다못한 일라이저가 그러면 헨리에게 돈을 돌려주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럴 용기가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행운인 줄 알았던 어떤 우연은 가끔 불운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굴러들어온 복을 감히 차버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 정도로 냉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유혹에 흔들리는 존재들인 거죠. 개인적으로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바로 알프레드 둘리틀이었습니다. 스탠리 할로웨이가 연기했습니다.


3. 스페인에 내리는 비


일라이저가 계속 연습하는 문장은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 입니다. 런던 코크니 사투리가 심한 일라이저는 이것을 계속 "라인 인 스파인 스타이스 마인리 인 다 플라인"이라고 발음하죠. 영국에는 Cockney, Estuary, Scottish, Geordie, Irish, Welsh 등 다양한 방언이 있습니다. 그중 코크니는 런던 중하층민들의 언어로 /ei/를 /ai/로 발음하거나 /h/를 묵음 처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듯 상류층의 진입장벽은 언어와 예절입니다. 그들의 말과 풍습을 익히지 못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상류층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언어와 문화를 익히려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상류층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고급 교육을 받지 못해 나중에 아무리 출세해도 상류층에 낄 수 없습니다. 신분상승의 길을 애초에 차단하고 있는 셈이죠. 이를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 부르며 문화권력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죠.


하지만 최근에는 셀레브리티들이 코크니를 사용하면서 일부러 /ei/를 /ai/로 발음하고 /h/를 묵음시키기도 하는 문화의 전유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를 현대에 맞게 각색한다면 남자 주인공은 더 이상 언어학자가 아닌 다른 종류의 직업으로 등장해야 할 것입니다. 32개 국어씩 하는 언어학자의 역할은 현대 시대엔 구글이 대신해주고 있으니까요.



4. 다시 들어도 좋은 음악들


애초 오드리 헵번은 본인이 직접 노래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너 브라더스는 뮤지컬 가수 마니 닉슨을 몰래 섭외해 더빙했습니다. 오드리는 격분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없는 영화는 2시간 5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꽤 길게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 익숙한 넘버가 나오는 장면 만큼은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좋습니다.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Wouldn't It Be Lovely" "On the Street Where You Live" "I've Grown Accustomed to Her Face" 등 모두 프레데릭 로우의 작품입니다.



Wouldn't It Be Lovely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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