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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지닌 결정적 요소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다. 비평가들은 고다르의 논쟁적인 영화들 때문에 그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미치광이 삐에로>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봤다. 대학생 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늘 주저않고 선택했던 영화. 몇몇 대사와 뮤지컬 장면은 외우다시피 하는 영화. 오랜만에 봐도 좋다. 여전히 몇몇 장면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좋은 건 특유의 발랄함과 우아함 때문인 듯하다.


장뤽 고다르 영화들 중 <미치광이 삐에로>는 내러티브가 뚜렷한 편에 속하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네 멋대로 해라> <주말>과 함께 <미치광이 삐에로>를 가장 좋아하는 고다르 영화로 꼽는데 아무래도 내러티브가 없는 이미지와 구호의 나열로 만든 영화는 부담스럽다.



<미치광이 삐에로>를 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방식. 둘째, 상징적 이미지와 대사들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 셋째,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를 각각 따로 열고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 첫번째 방식에 비해 두 번째가 어렵고 세 번째는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한다. 한 마디로 <미치광이 삐에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서 볼 때 더 잘 보이고 들리는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 계속해서 놓쳤던 새로운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처음 볼 때 자연스럽게 놓치게 되는 장면들이 많다는 뜻이다. 르느와르, 모딜리아니, 벨라스케즈, 피카소, 마티스 그림들이 스쳐지나가고 미국 영화감독 사뮤엘 풀러, 헝가리 촬영감독 라즐로 코박스 같은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하며, 알제리 전투,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 같은 사건들이 직접적으로 거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치광이 삐에로>의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가정생활에 권태를 느끼는 전직 스페인어 교사 페르디낭은 베이비시터 마리안느와 함께 리비에라로 밀월 여행을 떠났다가 사람을 죽이고 도피행각을 벌인다. 할리우드의 흔한 스릴러 영화 같은 줄거리 속에서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는 절도, 방화, 살인을 저지른다. 영화는 스릴러부터 액션, 코미디, 로맨스, 뮤지컬 등 장르를 넘나드는데 이는 영화 첫 장면에서 사뮤엘 풀러가 말한 영화에 대한 정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영화는 전쟁터요. 사랑, 증오, 액션, 폭력, 죽음. 한마디로 감정들을 담고 있으니까." - 사뮤엘 풀러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는 파티에서 처음 만난다.


페르디낭: 지하철 끊겼을텐데 어떻게 돌아가려고요?

마리안느: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울해 보여요.

페르디낭: 살다보면 바보만 만나게 되는 날이 있죠. 거울을 바라보면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기죠.


이탈리아 갑부의 딸과 결혼한 스페인어 교사 페르디낭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다. 그는 실직 후 그의 뮤즈 마리안느와 함께 도피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정은 그의 일기장에 꼬박 기록되어 있다. 한 마디로 <미치광이 삐에로>는 페르디낭의 일기장을 따라 전개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일기라는 것은 대부분 내러티브가 아닌 의식의 흐름 위주로 쓴다. 이 영화 역시 페르디낭의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된다. 영화를 보면서 메모한 대사와 나레이션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마리안느: 뭐가 보이죠?

페르디낭: 절벽을 넘어 60마일로 달리려는 남자의 얼굴.

마리안느: 나는 절벽을 넘어 60마일로 달리려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이 보여요.



지옥에서의 한철

사랑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무엇이다

수백 년의 시간들이 먼 곳으로 사라진다

수많은 폭풍처럼

나는 그녀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꾸는

우리만의 꿈이었다



시는 패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게임



폐허는 시의 언어를 만든다

작가는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찾은 휴양지 리비에라에서 페르디낭은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마리안느는 책 속의 삶과 현실이 다르다는 게 슬프다고 말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듣고 싶어한다. 여기 이 영화의 수많은 대사들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사 중 한 대목.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관한 대사다. 남자는 단어로 말하지만 여자는 느낌으로 생각한다는 말.



페르디낭: 좀 슬퍼보이는데?

마리안느: 당신은 나에게 단어로 말하고 나는 당신을 느낌으로 바라보니까요.

페르디낭: 당신하고는 대화가 불가능해. 생각은 없고 느낌뿐이지.

마리안느: 틀려요! 느낌이 생각이에요.



마리안느가 날씨가 좋다고 하면

난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져

"날씨가 좋아"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미지만 볼 뿐이야

그게 다야

이해한다는 건 뭐지?

꿈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꿈을 만들지

날씨가 좋아, 내 사랑

꿈 안에서, 언어 안에서, 죽음 안에서

날씨가 좋아, 내 사랑

날씨가 좋아, 삶 안에서



우리는 페르디낭이 간 것을 알았다.

(페르디낭) 툴롱에

그는 선창가에서 산책을 했다. 그는 묵었다.

(페르디낭) 리틀 팔라스 호텔에

그는 찾고 있었다.

(페르디낭) 마리안느를

그러나 찾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오후에는 가끔 영화관에서 잠을 잤다.

그는 여전히 일기를 쓴다.

말은 비롯 우리 매일의 삶에서 퇴화해 사라져도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그림자를 밝혀주기에

그 순수함만은 간직하게 된다.



난 내 손을 당신 무릎에 올려

행위 그 자체로 아름답지

삶은 그런 거야

공간과 느낌

이제 당신과 같이 가겠어

격렬한 분노의 이야기 속으로



다시 찾았어

뭘?

영원

그저 바다일 뿐이야

그리고 태양을



어떤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미치광이 삐에로>가 그렇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주제가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배우들이 멋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지금 봐도 세련된 만듦새에 풍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하고 있으면서도 단순함의 미덕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미술에 비유하자면 피카소의 입체화를 보는 것 같은 영화다. 장면 하나하나는 평면적이지만 감독이 보이는대로 찍어 이어 붙였기에 모아놓고 보면 입체적이다. 따라서 관객은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된다. 1965년작이다.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수록 더 많이 보이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그런 장면들은 내러티브에서 비껴가 있고 단지 상징적 이미지로서만 존재할 뿐이니까.


고다르는 만드는 영화마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인장처럼 새겨 넣은 감독이다. 사랑, 증오, 액션, 폭력, 죽음 등 <미치광이 삐에로> 속에는 여러 감정들이 등장하지만 그 감정들은 별개가 아니다. 모두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 결국 고다르에게 영화라는 것은 감정들을 따라가다가 주인공과 함께 폭발하면 되는 게임인 것이다.


그렇다면 멋지게 일탈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는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는 어떨까? 고다르는 이 두 사람에게 결코 달콤한 로맨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계속해서 페르디낭을 삐에로라고 부른다.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차를 타고 가면서 "내 사랑 페르디낭"보다 "내 사랑 삐에로"가 훨씬 근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페르디낭은 매번 자신의 이름은 페르디낭이라고 정정해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느낌대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와 매번 그 말을 정정해주는 남자. 두 사람은 함께 떠나오긴 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소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나면 카메라를 바라보며 절대 그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안나 카리나의 치켜뜬 눈동자와 마지막 장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얼굴에 칭칭 감은 뒤에 실수했다는 듯 도화선을 손으로 끄려는 장폴 벨몽도의 어설픈 손짓이 오버랩되는데 돌이켜보면 그 두 장면은 항상 말로 표현하는 남자가 부자연스런 행동으로, 느낌으로 표현하는 여자가 거짓말로 설명하는 장면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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