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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입니다. 초기 영화는 노출이 있어서 그랬지만 최근 영화에는 별로 노출이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이유는 홍상수 감독이 만든 영화제작사 전원사에서 아예 그렇게 등급신청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봐도 공감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한때 홍상수 감독은 아예 30세이상 관람가 등급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은채가 나오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그 입소문 덕분인지, 혹은 캐스팅이 화려한 덕분인지 이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꽤 흥행이 잘 됐습니다. 요즘 핫한 배우 정은채와 함께 이선균, 유준상, 류덕환, 기주봉, 김의성 등이 출연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기존 홍상수 영화들과 거의 비슷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것. 그마저도 <옥희의 영화>에서 이미 본 적 있었죠. 해원은 옥희처럼 심신이 불안정한 캐릭터입니다. 엄마가 캐나다로 홀로 자유를 찾아 떠나고 해원은 자꾸만 누군가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것도 나이 든 남자를요.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젊은 남자와 한 번, 나이든 남자와 한 번 아차산 등산을 했던 것처럼 해원도 두 번 남한산성에 오릅니다. 한 번은 감독이자 교수(이선균)와 또 한 번은 꿈속에서 절친한 언니(예지원)와 그녀의 불륜남(유준상)과 함께요.


재미있는 것은 곳곳에 자기 영화의 패러디를 숨겨놓았다는 것입니다. <하하하>의 유준상-예지원 커플이 7년째 불륜중인 커플로 등장하고, <옥희의 영화>의 시간강사 이선균은 이제 교수가 되어 당시 자신이 싫어하던 송교수(문성근)처럼 제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워낙 비슷한 이야기를 같은 사람들과 계속 만들어오다보니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프랑수아 트뤼포가 장-피에르 레오를 계속해서 앙뜨완느 드와넬로 출연시켰던 것처럼요. 흠, 뭐 그 정도까지의 애착은 아직 아니려나요.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땐 딸과 엄마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엄마가 등장하고 해원이 갈등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홍상수 영화이니만큼 모텔과 교수와 불륜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제목과 전혀 관련 없이 기존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의 제목은 그저 상징적입니다. 해원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줄 뿐이죠. 극중에 미국 교수로 나오는 김의성이 해원에게 작업을 걸면서 그녀의 캐릭터를 분석해주는데 "강한 무언가가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고 부딪히더라도 자꾸만 싸워서 깨부수려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죠. 그 여자가 바로 해원인 겁니다.


그런데 해원은 속물적인 여자이기도 합니다.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나이 든 남자에게 계속해서 끌리는 젊은 여자. 그녀는 한 번 봤을 뿐인 나이든 남자와 결혼을 생각합니다. 극중 예지원의 말에 따르면 '도망치듯' 미국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모험이 아닌 안정을 찾아 떠나고 싶어합니다. 김의성이 보았던 것과 정반대죠.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한 듯 보이지만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여자가 바로 해원입니다. 그렇게 보면 '누구의 딸도 아닌'이라는 수사는 어떻게 설명하기 힘들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북촌, 서촌, 남한산성, 대학교, 도서관, 그리고 술집이 영화의 무대입니다. 회차와 장소 이동을 줄이기 위해 당연히 반복되는 중첩이 플롯의 기본 구성인데 <옥희의 영화>나 <다른나라에서>가 이런 가능성, 저런 가능성을 바탕으로 장소를 중첩시킨데 반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해원의 꿈이냐 아니냐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어디까지가 해원의 꿈이고 실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영화적 장치일 뿐인 듯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고요. 그저 홍상수 영화는 전체 내용의 짜임새를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즐겨주면 그만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술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의 홍상수 영화에선 불륜의 꼬리가 밟히는 장면이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아마 직접적으로 보여줬다면 <사랑과 전쟁>이 됐겠죠.) 바로 이 장면에서 약간 우회적으로 등장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신 적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게 되죠. 그런데 결정적인 제보를 한 식당 아주머니는 목소리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자주 인물들의 뒷모습만 담고 있습니다. 산을 올라갈 때나 인물이 벤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도 뒷모습만 잡은 씬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면으로 마주보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뒷모습을 볼 때 더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카메라도 결국 그런 설정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 벤치 장면에서 그들의 앞모습을 담았다면 그건 엔딩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론 저예산 영화가 테이크를 적게 가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하겠고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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