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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교본 같은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업의 정석> <싸움의 기술> <아부의 왕>처럼 고수가 등장해 비법을 전수하는 영화들. 그런데 <남자사용설명서>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감독의 실험정신. 일찍이 <미지왕>에서 시작되어 <다세포소녀>를 거쳐 <귀여워> <썬데이 서울> <삼거리극장>으로 이어진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영상들의 향연. 최근엔 맥이 끊긴 줄 알았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아주 고집스럽게 밀고나간건 아니지만 이 정도의 발랄함이 아직 한국영화에 남아 있어서. 신인감독이 아니면 할 수 없을 도전. 예상대로 이원석 감독은 CF 감독 출신이다.


<남자사용설명서>의 초반 30분은 기억할 만하다. <비카인드 리와인드>처럼 옛날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처럼 시작했다가 각종 CF 형식을 자유롭게 차용하더니 박영규가 50만원짜리 남자사용설명서의 사랑의 화신 스왈스키 박사로 등장해 최보나(이시영)에게 코칭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보나는 딱히 남자들에게 관심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 즉 이 비디오는 그녀가 필요해서 구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과장광고에 속아서 거금을 들여 샀을 뿐이다. 광고계 연출부 세컨드로 남자들의 세계에서 일하다 보니 어느새 말투도 남자처럼 변했고 밤샘을 밥먹듯 하다보니 머릿결도 피부도 푸석해졌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디오테이프를 틀었는데 남자사용 비법이라고 스왈스키 박사가 러시아 모델들과 함께 맨 처음 알려주는 것이 "마주보고 웃어라 Look Hold and Smile." 어이가 없어 끄려는데 스왈스키 박사가 한 마디 더 한다. "너무 뻔하다고요? 하지만 실행해보세요.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린 대상은 대스타로 떠오른 이승재(오정세). 그뒤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그대로다. 티격태격하다가 매뉴얼이 아닌 진심을 발견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그 사이에 화성 남자 금성 여자처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남녀, 시종일관 섹스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남자, Blue Ball 같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어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시영과 오정세의 유쾌하고 풍부한 연기력에 기대고 있다. 특히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려고 애쓰는 남자와 막으려는 여자, 또 리조트에서 알몸으로 난간에 매달렸다가 차에 올라탔는데 교통단속에 걸린 남자는 박장대소할 정도로 재미있다. 여기에 개성 강한 조연 캐릭터들도 한 몫 하고 있다. A 마이너와 E 마이너 기타 코드를 잡는 육봉아 감독(이원종), 발정난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진대표(배성우) 캐릭터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어차피 전반부의 신선함을 영화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어딘지 익숙한 장면을 보는 것은 안타까웠다. 분명히 더 재기발랄하게 찍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초반 코미디 후반 드라마'라는 정형화된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무시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보나는 톱스타와 애정관계를 통해 감독으로 입봉하고 승승장구해가는데 결국 여성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지름길은 남자를 잘 만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의식한 듯 영화는 후반부에 뻔한 변명거리를 준비해놓고 있다. 그것은 매뉴얼 없이 보나가 사랑과 일을 동시에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원래 태생부터 발랄한 여성이 남성에게 순응해가는 보수적인 장르인 것을 어쩌겠나. 그리고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박영규의 스왈스키 박사 캐릭터. 현실에 개입하며 사랑의 전령처럼 등장하고 있지만 우디 앨런 영화의 사랑의 전도사처럼 보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너무 기존의 박영규스러운 이미지에만 기대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판타스틱한 캐릭터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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