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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는 여전히 <별의 목소리>와 <초속 5cm>로 기억되는 이름입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cm에 담긴 감수성은 잠들어 있던 감각들을 깨워주었고, <별의 목소리>에서 우주의 시차 때문에 수십년 후에 전달되는 이메일이라는 설정은 광활한 우주에서 고독한 인간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또 상처받는지를 통해 사랑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통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멋진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나홀로 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어 혜성처럼 데뷔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 그러나 강렬했던 그의 첫 인상 때문일까요? 그가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선 새로움을 느끼기 힘듭니다. 작정하고 만든 장편영화인 <별을 쫓는 아이>는 제목과 달리 미야자키 하야오 식의 판타지 세계를 답습하는 것처럼 보여 실망스러웠고, 지금 소개할 영화 <언어의 정원>은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역력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상에서는 별다른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카이 마코토이기에 뭔가를 더 기대하게 되는데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무대는 도쿄 신주쿠의 중앙 공원입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두 개의 거대한 호수 사이에 있는 길에 놓인 정자에 한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소년은 여자를 바라보고 살짝 망설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구두 스케치를 해왔고 여자는 비오는 날마다 그곳에서 초콜릿을 안주 삼아 캔맥주를 마셔왔습니다. 여자는 소년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옆으로 비켜줍니다. 그날부터 비오는 날마다 두 사람의 공원 만남이 시작됩니다.


15살인 소년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엔 식당 알바를 한 뒤 저녁엔 집에서 구두를 만듭니다. 네, 구두 맞습니다. 남자구두 여자구두 가릴 것 없이 정말 열심히 구두를 만들어요. 일본 영화나 소설을 읽다보면 한국 문학이나 영화에선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직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루키 책의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는 학창시절부터 기차역을 만드는 걸 꿈꿔 왔고, 평생 우동만 만들어온 요리사의 아들이 주인공인 <우동> 같은 영화도 있죠.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나라답게 무언가를 만들고 대물림하는 것을 굉장히 숭배하기에 이런 직업들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소년이 구두를 만드는 설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최종적으로 만들 구두는 그 여자를 위한 것입니다. 발의 치수를 재기 위해 여자는 벤치 위에 올라 섭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감성으로 그려낸 여자의 시크한 옆 얼굴과 긴 다리도 물론 돋보이지만 그 장면에서 여자는 소년을 남자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고민을 살짝 털어놓습니다. 소년은 문득 자신이 비오는 날마다 만나는 이 여자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빗줄기와 겹쳐 이 장면은 참 로맨틱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장마가 끝나고 두 사람은 더이상 만나지 못합니다.


여자는 사실 소년이 다니는 학교의 스물 일곱 살난 선생이었습니다. 동양 문화권의 관객이라면 두 사람이 '띠동갑'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겠죠. 한 남학생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 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년이 나타나 가슴 속에 들어온 겁니다. 결국 여자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출근합니다. 학교에서 소년을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이었다니. 소년은 충격받습니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따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미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날 모처럼 다시 비가 내립니다. 천둥이 치더니 본격적으로 비가 옵니다. 소년과 여자는 늘 만나던 곳에서 만납니다. 호수가 떠내려 갈 것처럼 비가 퍼붓고 두 사람은 빗속에서 손을 잡습니다.



열 다섯 소년과 스물 일곱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요? 소년은 구두를 완성했을까요? 십여 년 전이라면 학생과 선생의 사랑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었겠지만 요즘 시대라면 스토리보다는 영상 그 자체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계속 비가 내립니다. 정원에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두 사람이 못다한 언어 같습니다. 때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같고 때론 따뜻한 드립커피를 내리는 소리 같고, 때론 폭풍우처럼 모든 소리를 집어삼켜 서먹하게 느껴지는 두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수성 애니메이션의 개척자이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촉촉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신카이 마코토. 46분의 짧은 영화인 <언어의 정원>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심오함과 달리 영상 그 자체를 즐기며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바라건데 다음 작품에서는 스토리에도 좀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8월 14일 개봉.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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