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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때론 결과가 더 중요해. 결과를 얻지 못하면 과정은 의미가 없지. 아빠는 너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니.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면서 살면 안 되겠지?”


아빠 로메오(애드리언 티티에니)는 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래거스)를 붙잡고 비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빠의 소원은 딸이 꼭 이 땅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 딸은 이미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합격해 놓았다. 다만 졸업시험을 통과해야만 유학이 가능하다.



그런데 졸업시험을 보기 하루 전날, 엘리자는 학교 앞에서 강간미수 폭행사건을 당한다. 팔에 기브스까지 하고 정신 안정이 필요한 딸이 시험을 보기 힘든 위기에 처하자 아빠는 고위 공직자에 줄을 댄다. 그리고는 딸에게 딱 한 번만 부정을 저지르자고 말한다. 시험지 마지막 답 세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 그것이 부정의 신호다. 과연 딸은 아빠의 부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또, 로메오의 내연녀인 산드라(말리나 마노비치)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려 하지만 신청하기도 전에 마감됐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연줄을 대고 부탁을 한 누군가는 손쉽게 새치기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부정 청탁이 만연한 루마니아 사회는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영화는 딸의 내일을 놓고 고민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 루마니아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적 있는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엘리자의 내일>(원제 ‘바칼로레아’)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루마니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회비판적 드라마다.


영화의 주인공인 로메오는 존경받는 외과의사지만 그런 그마저도 비윤리적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아내 마그다(리아 버그나)는 그에게 “이렇게 되면 우리가 딸에게 가르친 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지만 로메오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모두가 부정하게 사는 세상에서 억울하게 손해보며 사는 사람은 자신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딸이 정의롭지 못한 나라를 벗어나기를 바라는 그는 결국 딸을 정의롭지 못한 일에 끌어들인다.



“아빠는 1991년 젊었을 때 후퇴한걸 지금도 후회하고 있단다.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로메오의 결심은 젊은 시절의 트라우마와 관련 있다. 그는 한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열혈 청년이었지만 끝내 좌절한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의 부패한 사회를 만든 것이 결국 자신의 세대였다는 죄책감이 무뎌진 끝에 그는 현실과 타협에 이른 것이다.


루마니아 민중은 1989년 크리스마스에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끌어내려 총살시키는 저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권력을 잡은 것은 일리에스쿠라는 또다른 민족주의자였다. 일리에스쿠가 이끄는 민족구국전선은 군, 경찰, 언론 등을 장악했고,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감시 하에 놓였다. 1990년 대학생들이 봉기했지만 일리에스쿠는 부카레스트에서 1만명의 광부들을 동원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숫자만 많은 야당들은 지리멸렬해 민족구국전선의 권력 장악을 막지 못했다. 일리에스쿠의 독주는 1997년 정권교체 전까지 계속된다.


부패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투쟁에 나선 청년들은 제대로 뭉쳐보지도 못하고 쓰라린 실패를 맛봐야 했다. 로메오의 변심은 이러한 역사의 연장 선상에 있다. 싸워야 할 때 제대로 싸우지 못한 후회가 중년이 된 지금 트라우마로 남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는 틈틈이 전화벨이 울린다. 집 전화벨이 울리고,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인물들은 전화를 받을 때도 있고 다른 일을 하느라 받지 않을 때도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은 무언가를 상기시키려는 목적일 때 주로 쓰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서 긴 전화벨이 한 남자가 묻어둔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엘리자의 내일> 속 전화벨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로메오와 동세대의 루마니아 관객을 향해, 그들이 옛 기억을 상기시키기를 바라면서 울리는 것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엘리자의 졸업식에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해맑은 표정이다. 이 학생들에게 과연 이토록 부패한 나라를 물려줘야 할지 묻는 듯 뜨끔한 엔딩이다. 시종일관 음악 없이 건조하게 인물들의 행동을 좇는 카메라는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예리하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다.


엘리자의 내일 ★★★★

루마니아의 오늘을 반추하는 건조한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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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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