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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왜 창의력이 샘솟는 걸까? 뜬금없지만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그 후>를 보다가 든 생각입니다. 저는 사실 스캔들이 터지기 전 홍상수 영화에서 권태를 느껴왔습니다.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동어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이 등장하고, 여자 꼬시기를 궁리하고, 이것을 여러 시점에서 담는 것이 그동안 홍상수 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이었습니다.


김민희와 홍상수


그런데 스캔들이 터진 후 홍상수의 영화는 바뀌었습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그전까지 홍상수 영화와 달리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기존에 자주 사용하던 반복 구조도 버렸습니다. 김민희로부터는 최고의 연기를 끌어냈고요. <그 후>는 포복절도할 코미디인데 가벼움 속에 심오함을 적당히 녹여 한 장면도 지루한 순간이 없습니다. 여전히 저예산으로 미장센은 가볍고, 줌이 유일한 카메라 기교일만큼 형식적인 면에선 달라진 게 없지만, 영화는 예전보다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습니다.


그에게 다른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대중에게 지탄받을 만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사랑에 빠지면 고갈된 창의력도 솟아나는 걸까요? 그래서 구글링을 해봤습니다. 네 가지 정도의 과학적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랑에 빠지면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된다.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심리학자 옌스 푀르스터 등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본다고 합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와 함께 하는 미래를 설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폭넓은 관점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물 하나를 고를 때에도 향수를 사줄까, 시계를 좋아할까, 음악을 들려줄까, 여행을 갈까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민해보게 되는 것이죠. 나만의 좁은 시야를 넘어,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폭을 알게 모르게 점점 넓어지게 해줍니다.



2003년 트로페와 리버만이 확립한 해석수준이론(CLT)에 따르면, 인간은 심리적 거리에 따라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자신과 심리적 거리가 짧을수록 하위 해석수준(쾌락, 충동)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심리적 거리가 길수록 상위 해석수준(철학적)으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과 오랫 동안 함께 할 사람에 대해 갖는 생각 자체가 이토록 다른 것이죠. 이는 그 사람이 가진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됩니다.


단지 섹스에 관한 욕망만 가진 사람은 ‘지금 여기’의 좁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먼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더 넓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되면 창의력이 샘솟습니다. 그동안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이 연합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큰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것이 창의력을 높입니다.




둘째, 사랑에 빠지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마라지티 등의 1999년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면 몸속의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진다고 합니다. 세로토닌은 분위기, 행동, 사고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으로 흔히 ‘행복 호르몬’으로 불립니다. 쾌락과 정열을 불러오는 도파민 신경, 불안과 스트레스를 관장하는 노르아드레날린 신경을 억제함으로써 너무 흥분하거나 불안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한 마디로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은 평온한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로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든 사람은 열정적인 한편으로 스트레스도 쉽게 받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특히 신혼부부들의 세로토닌 수치가 아주 낮은데 이들은 상대방의 생각에 과하게 집중해 때론 강박장애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들면서 예술가는 더 열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창의력을 높입니다.




셋째, 사랑은 감각 능력을 향상시킨다.


사랑에 빠지면 평소에 맡지 못한 냄새를 맡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살결에 닿는 느낌도 예전과 다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이 새롭고 아름답게 보인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마음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바꾸어버리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스테파니 오르티그 교수팀이 남녀의 뇌를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해 관찰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남녀의 뇌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뇌보다 감각 인지에 관여하는 호르몬 분비가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을 비롯해 ‘친밀 호르몬’ 옥시토신, ‘혈압 호르몬’ 바소프레신 등 감정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분비가 늘고, 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등도 분출되면서 신체 오감의 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됩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광고 'AIDES: COLOURS OF LOVE' (c)TBWA


예술가로서는 막혀 있던 감각이 살아나면서 언어 구사능력, 시공간 인지 능력이 향상되니 '그분'이 찾아온 듯 영감이 마구 샘솟을 것입니다. 사랑의 ‘뮤즈’는 이처럼 과학적 근거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랑의 이런 효능은 마약과도 비슷합니다. 마약 역시 호르몬을 조절하는 역할을 통해 환각 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술가들 중엔 보들레르, 랭보, 도스토예프스키 등 마약 중독자들도 꽤 많았습니다. <루시> <리미트리스> 같은 영화에는 약물 투입을 통해 두뇌 기능을 향상시킨 인간이 나오는데 이는 사랑의 힘을 신체 감각을 넘어 물리적인 신체 능력으로까지 확장시킨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감각을 깨우는 사랑의 효과는 연령대와도 무관합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와 코벤트리 대학교 연구팀이 50~83세의 노인 73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당 최소 한 번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전혀 성생활을 하지 않은 고령자들보다 일부 인지기능 검사 결과가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넷째, 사랑에 빠지면 긍정적이 돼 겁이 없어진다.


영국 런던 대학교 신경미학과 세미르 제키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는 네 가지 기능이 비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조절하는 편도체,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는 중간측두피질, 판단력을 좌우하는 전두엽, 감정을 조절하는 후측대상회 등이 일시적으로 제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죠. 이때 현실을 인지하는 감각 역시 이상화된 방향에 맞추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방해받습니다. 마음 속에 장애물을 쌓아놓고 도전을 망설이고, 다양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려 합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지 못할 뿐더러 창작을 시도해보려 하다가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몇몇 예술가들은 압박과 우울 속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때 사랑은 어둠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해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예술가가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참고: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does-falling-in-love-make/

https://www.thrillist.com/sex-dating/nation/falling-in-love-art-creative-inspiration

http://www.refinery29.com/2014/01/61317/love-sweetness-study

http://www.mdtoday.co.kr/mdtoday/index.html?no=28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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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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