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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썰렁한 흑백 화면에 흑인 주인공이 외딴 집 안에 숨어 있고 밖에는 10여명 정도의 좀비들이 흐물흐물 느리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집에 갇힌 인물들도, 관객인 저도 그들의 정체를 모릅니다. 저게 대체 뭐지? 그때 좀비들이 다가오더니 인간들의 육체를 하나씩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컬러가 아닌 흑백 화면이 고마운 장면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 영화에서 좀비에게 물린 인간은 좀비가 됩니다. 그전까지 좀비는 부두교에서 되살아난 시체를 뜻하는 단어였지만 이 영화는 '전염성'이라는 요소를 가미해 좀비를 재정의한 것입니다. ‘전염성’은 자본주의, 군국주의, 계급사회 등 인간 지배체제의 본질을 설명할 때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좀비는 이후 엄청난 파괴력을 몰고옵니다. ‘좀비’는 현대 사회의 메타포가 됐고, 이 감독은 이후 ‘좀비영화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좀비영화의 아버지’로 불려온 조지 A. 로메로 감독(1940~2017)이 7월 16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폐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영화 <말 없는 사나이>(1952)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캐나다 토론토에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를 비롯해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뮤지컬 영화 <호프만의 이야기>(1951), 하워드 혹스와 크리스찬 나이비의 공포영화 <괴물>(1951), 오손 웰즈의 <오델로>(1952),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1954) 등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 다섯 편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는 영화입니다.) 그는 <호프만의 이야기>에 가장 빠져들었고, 이 영화처럼 만들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인형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인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왠지 영혼없이 달려드는 좀비의 순수한 원형이 느껴지지 않나요?)
로메로는 중학생 시절인 1954년 아버지가 사준 8mm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The Man from the Meter’라는 영화를 만들 땐 촬영하다가 인형에 불을 붙여 빌딩에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59년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지금의 카네기멜론대학)에 진학한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촬영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때 그가 본 것은 스타와 함께 하는 낭만적인 영화 제작 과정이 아니라 너무나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효율성만을 중시하며 공장처럼 찍어내기 급급한 할리우드 시스템에 의문을 갖게 되고 이후 자신이 직접 연출부터 촬영, 편집까지 도맡는 시스템을 구상합니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공포영화에 도전했을까요? 아닙니다. 호러영화 마스터의 시작은 의외로 <로저스 씨의 이웃>이라는 어린이 단막극이었습니다. 30년이 넘게 방송된 장수 TV 프로그램 중 12개의 에피소드를 로메로가 연출합니다.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프레드 로저스가 로메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을 맡긴 것이죠. 훗날 로메로는 "당시 만든 [로저스 씨, 편도선 수술 받다] 편은 지금껏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무섭다. 그걸 만들 때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으니까”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네요.
1963년부터 그는 생계를 위해 피츠버그에서 ‘라텐트 이미지’라는 회사를 차리고 기업용 동영상과 광고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꿈을 간직한 그는 주말마다 시간을 내 친구들과 영화 만들기를 시도합니다. 마침내 29세 때인 1968년 리처드 머시슨의 SF [아이 엠 레전드]에서 영감받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첫 장편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해 친구들과 함께 농가의 외딴 집을 빌려 찍었고, 컬러필름 대신 흑백 필름을 써야 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영화의 음습한 분위기와 더 잘 어울리는 효과를 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겠네요.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반응은 미적지근했고 흥행은 그저그랬습니다만, 영화는 서서히 입소문을 탑니다. 드라이브인 극장과 심야 TV방송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며 ‘저주받은 걸작’으로 재평가 받습니다. 11만4천달러를 투입한 이 저예산 영화는 결국 전세계적으로 3천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이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제작비 대비 무려 263배에 달하는 초대박 영화가 된 것입니다. 로메로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이름을 알립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배경은 농가입니다. 남매인 조니와 바바라는 죽은 아빠의 무덤을 찾아가다가 좀비의 습격을 받습니다. 조니는 죽고 바바라만 외딴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곳엔 이미 좀비를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창밖으로 좀비떼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합니다. 좀비들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미처 피하지 못한 인간의 육체를 물어뜯고 먹어댑니다. 좀비 중엔 조니도 있어 바바라는 깜짝 놀랍니다. 혼비백산한 사람들 가운데도 정신 똑바로 차린 현명한 리더가 있었으니 그는 흑인 청년 벤입니다. 그는 집 밖으로 도망칠 묘안을 짜내고 이제 살아있는 시체들과 인간들 사이의 쫓고 쫓기는 대혈투가 벌어집니다.
영화에서 시체들이 되살아나 좀비가 된 원인은 방사능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를 보면 당연히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리더가 흑인인 것은 인종차별에 대한 반어법이고요. 죽은 아이가 좀비가 되어 부모를 공격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점점 늘기 시작한 핵가족과 전통가족 붕괴에 대한 공포를 담고 있습니다. 로메로의 좀비 영화는 이처럼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메타포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좀비영화에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집어넣는 것을 늘 의식했고,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촬영 현장의 조지 A. 로메로
로메로는 거의 10년에 한 편 꼴로 ‘좀비 3부작’을 만들었는데요. 세 편은 연속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좀비가 등장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두 번째 좀비 영화인 <시체들의 새벽>(1978)은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가 공동 투자한 영화입니다. 로메로와 아르젠토는 동갑내기로 둘다 B급 공포영화를 걸작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죠. 로메로가 좀비로 커리어를 쌓아나갔다면, 아르젠토는 ‘지알로’라 불리는 폭력적이고 초현실적인 미스터리 호러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시체들의 새벽>은 150만 달러를 들여 550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히트를 기록하며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둡니다. 이 영화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에드거 앨런 포 원작의 <검은 고양이>(1990)를 공동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새벽>은 백화점을 좀비들의 해방구로 만들어버리는 간 큰 상상력의 영화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미지의 병원체로 인해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듭니다. 도망다니던 네 사람이 한 건물로 피신하는데 그곳은 마침 백화점입니다. 하지만 좀비들에게 백화점이 의미가 있을 리 없죠. 오직 인간들만이 백화점의 용도를 자각할 뿐입니다. 마침내 건물 입구가 뚫리고 좀비들이 들이닥치며 백화점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소비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백화점에 등장한 좀비는 닥치는대로 인간을 먹고, 좀비가 된 인간은 유령처럼 백화점을 떠돕니다. 매장에 진열된 어떤 멋진 신상품도 의미가 없습니다. 먹을 수 있느냐 아니냐로 나뉠 뿐이죠. 소비가 최고선인 사회, 백인 중산층의 도덕적 위선, 물신주의 등을 통렬하게 비판한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메로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로부터 7년 후에 만든 <시체들의 날>(1985)은 훨씬 더 무겁고 지독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답답한 지하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미국 어느 도시의 지하벙커에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지상은 좀비들에게 점령당해서 이들은 지하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크게 군인과 민간인으로 나뉘는 인간들은 좀비를 생포해 연구하고 도시의 생존자를 탐색하는 일을 합니다. 군인은 폭력적이어서 과학자, 의사, 헬기 조종사 등으로 구성된 민간인들과 갈등을 겪습니다.
<시체들의 날>
<시체들의 날>
<시체들의 날>은 로메로 영화 중 가장 하드고어적인 표현이 담긴 영화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계급 갈등이 벌어지고,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결국 자멸해 좀비화됩니다. 이 영화의 좀비들은 내장기관을 다 없애버려도 여전히 왕성한 식욕이 남아 있는데 이는 욕망의 무의미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입니다. 또 영화 속 군인들은 소련과 군비경쟁을 벌이던 레이건 정부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로메로 감독이 작정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를 날린 영화라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총 쏘고 복수하는 등 학습하는 좀비가 처음 등장한 영화이기도 하고요.
‘좀비 3부작’은 각각 냉전, 자본주의, 계급 사회를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많은 평론가들 역시 영화가 내포한 사회비판적 요소에 후한 점수를 주었고 덕분에 로메로는 B급 장르영화 감독임에도 ‘작가’의 칭호를 얻습니다.
‘좀비 3부작’은 많은 후배 감독들이 오마주하거나 리메이크했습니다. <바탈리언>, <이블데드>, <데드 얼라이브>, <28일후...>, <레지던트 이블>, <새벽의 황당한 저주>, <좀비랜드>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좀비 3부작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좀비영화 <부산행>도 그중 하나고요. 로메로의 열렬한 팬인 조나단 드미 감독은 <양들의 침묵>(1991)을 만들 때 그에게 FBI 수사관 역에 카메오 출연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로메로 감독은 피츠버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흔쾌히 출연해주었고요.
‘좀비 3부작’은 모두 리메이크되었는데 평가는 그저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1990년 톰 사비니 감독이 리메이크했고, <시체들의 새벽>은 2004년 잭 스나이더 감독이, <시체들의 날>은 2008년 스티브 마이너 감독이 다시 만들었습니다.
로메로가 좀비영화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18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중 6편이 좀비영화, 10편이 호러영화입니다. 그중 치명적인 생화학 무기를 피해 도시를 탈출하는 과정을 담은 <미치광이들>(1973), 지능을 가진 살인보조 원숭이를 그린 <어둠의 사투>(1988) 등이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마녀를 소재로한 <마녀의 시즌>(1973), 뱀파이어 이야기 <마틴의 흡혈귀>(1978) 등 고전적인 호러 영화도 있고요.
<미치광이들>
<어둠의 사투>
<크립쇼>
또, 로메로는 <나이트라이더>(1981)에 깜짝 출연한 것을 계기로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과도 협업했습니다. 킹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작품인 <크립쇼>(1982)도 로메로의 연출을 거쳐 세상에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크립쇼 2>(1987), <어둠 속의 외침>(1990), <다크 하프>(1993) 등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TV시리즈 <어둠 속의 외침>(1984~88)도 로메로와 킹 콤비의 합작품입니다.
조지 A. 로메로와 스티븐 킹
촬영 현장의 조지 A. 로메로
로메로의 필모그래피에는 호러가 아닌 의외의 영화 2편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곳엔 항상 바닐라가 있다>(1971)는 무려 로맨틱코미디이고, <모터싸이클의 기사들>(1981)은 기사 복장을 한 채 모터싸이클 순회공연을 펼치는 밴드를 그린 액션 드라마입니다. 물론 이 영화들은 흥행과 비평 모든 면에서 혹평받았습니다. 신은 그에게 모든 영화를 다 잘 만드는 재능은 주지 않았나 봅니다.
새로운 도전이 잘 안될 때마다 그는 좀비영화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게 좀비는 초심이었고, 마음의 고향이었으며,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로메로는 2005년 65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좀비 3부작에 도전합니다. 마침 <28일후…>(2002) 이후 좀비영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던 시기였죠. 더 빠르고, 집단지성을 갖추고, 스케일 큰 좀비영화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나봅니다. 레전드로서 명성을 잃을까봐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한 자세는 높이 살 만하지만 결과는 그저 그랬습니다. <랜드 오브 더 데드>(2005)는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만든 <다이어리 오브 더 데드(시체들이 일기)>(2008), <서바이벌 오브 더 데드>(2009)는 안쓰러운 수준이었죠.
<랜드 오브 더 데드>는 극심한 빈부격차의 양극화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의 탐욕을 비판했고, <다이어리 오브 더 데드>는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카메라가 도처에 만연한 감시사회를 까발렸습니다. 또, <서바이벌 오브 더 데드>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침몰을 이야기합니다만 예전만큼의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어 그의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평생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입니다. 좀비영화의 놀라운 흥행기록을 본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가 그를 영입하려 한 적도 있지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미이라>(1999)입니다. 협상이 꽤 진행됐지만 결국 불발돼 하차합니다.
로메로로부터 출발한 좀비는 최근 대중화됐습니다. 더 이상 B급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에 자주 등장하고 있죠.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가 문턱을 확 낮춘 이후 <웜바디스>(2012), <월드워Z>(2013)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에 영향받은 한국 드라마에까지 좀비가 나올 정도죠.
하지만 로메로는 이런 현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좀비물을 죽였다”며 악평을 퍼붓기도 했죠. <워킹 데드>는 "좀비가 드문드문 등장하는 연속극일 뿐"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좀비는 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할리우드는 제작규모를 턱없이 올려놨을 뿐만 아니라 좀비마저 팬시화시켰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어찌보면 '꼰대' 같기도 하지만, '좀비영화의 아버지'로서 상업화되어가는 좀비를 지켜야겠다는 순수한 의지가 느껴지는 발언입니다.
조지 A. 로메로
조지 A. 로메로의 영화 인생은 좀비로 시작해 좀비로 막을 내렸습니다. 단편적인 광고를 찍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스물 아홉 살의 가난한 청년이던 그는 너무나도 영화가 만들고 싶어 고민하다가 어릴적 본 벨라 루고시의 <드라큘라>(1931), 보리스 카를로프의 <프랑켄슈타인>(1931) 같은 영화에서 영감받아 단순하고도 집중도 높은 괴물 캐릭터를 생각해냅니다. 로메로 이전에 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누구나 로메로를 '좀비영화의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그가 만들어낸 좀비는 어쩌면 치기어린 장난으로, 찍을 게 그것 밖에 없어서,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도한 피조물이었지만, 이후 그 장난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결국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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