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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출신의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현대 미국인들의 삶 속에 감춰진 고독을 즐겨 그린 화가입니다.


‘빛과 그림자’는 호퍼의 작품을 설명하는 열쇳말입니다. 그는 콘트라스트 강한 빛을 그리기를 즐겼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저택, 등대, 스카이라인, 지붕, 중산층 아파트, 식당과 바 등 현대 미국인들의 빛과 그림자가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그가 그린 작품들은 마치 어떤 이야기의 한 부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감춰진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호퍼의 그림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죠. 이처럼 그림들이 매우 서사적이기 때문에 호퍼의 작품은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독의 메타포로서의 여성, 텅 빈 공간, 창문들과 집들, 한낮의 빛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몹시 호퍼적입니다.


호퍼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극장을 찾을 만큼 영화를 좋아했고, 또 영화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호퍼의 그림과 영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셈이네요. 호퍼의 작품에서 영향받은 영화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의혹의 그림자>


1. 의혹의 그림자 (Shadow of a Doubt, 1943) - 알프레드 히치콕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한 히치콕은 아주 미국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호퍼의 리얼리즘을 모티프로한 작품을 만들기로 합니다.


따분한 삶을 견디지 못하는 찰리에게 연쇄살인범인 삼촌 찰리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죠. 영화 속 배경은 호퍼의 작품 Hodgkin’s House (1928)과 유사합니다.


한참 후 팬들은 호퍼가 Summertime (1943), Room for Tourists (1945) 등을 그릴 때 이 작품에 영감받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Hodgkin’s House

Summertime

Room for Tourists



<진홍의 거리>


2. 진홍의 거리 (Scarlet Street, 1945) - 프리츠 랑


호퍼의 작품들은 특히 누아르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진홍의 거리>는 중산층 남자 크리스의 위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미스터리의 젊은 여인 키티를 만나는데 그녀에게는 갱스터인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키티는 크리스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었죠.


빛의 사용, 관음증적 시선, 고독, 우울 같은 정서, 배경이 된 뉴욕 아파트 등이 호퍼의 그림과 닮았습니다.


<살인자들>


3. 살인자들 (The Killers, 1946) - 로버트 시오드맥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 소설 [살인자들]을 읽고 호퍼는 1942년 전설적인 그림 ‘밤을 새는 사람들(Nighthawks)’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는 호퍼의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두 명의 살인자가 바에서 만납니다. 이때 빛과 그림자의 콘트라스트가 사물의 질감을 강조합니다. 담배가 연기를 내뿜고 버려집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호퍼의 작품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듯하기까지 합니다.


Nighthawks


<포스 오브 이블>


4. 포스 오브 이블 (Force of Evil, 1948) - 아브라함 폴론스키


범죄와 음모로 가득한 이 영화가 뉴욕을 바라보는 방식은 매우 호퍼 스타일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수동적이고 브루클린 브릿지, 등대 등 배경에는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작에 들어가기 전 감독은 촬영감독 조지 반스를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회에 데리고 가서 그의 작품처럼 찍어달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네이키드 시티>


5. 네이키드 시티 (The Naked City, 1948) - 줄스 다신


“벌거벗은 도시에는 800만개의 이야기가 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호퍼의 그림에서 도시의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고독한 표정, 그 속에 섞여 있는 고독한 여인 등은 호퍼의 작품 Automat (1927), Chop Suey (1929) 등이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Automat

Chop Suey



<윈도우>


6. 윈도우 (The Window, 1949) - 테드 테츨라프


배경은 뉴욕 교외, 토미라는 소년이 이웃집에서 벌어진 살인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소설과 영웅담을 워낙 좋아하는 토미가 그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비롯됩니다. 나중에 토미는 진짜 살인을 봤다고 고백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호퍼가 뉴욕의 건물과 아파트를 그린 많은 작품들이 이 영화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Skyline Near Washington Square (1925), Roofs, Washington Square (1926), From Williamsburg Bridge (1928) 등입니다. 그래서 토미가 지붕 위와 공사중인 건물 사이에서 쫓길 때는 호퍼의 그림 속 뉴욕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Skyline Near Washington Square

Roofs, Washington Square

From Williamsburg Bridge


<이창>


7. 이창 (Rear Window, 1954) - 알프레드 히치콕


관음증에 관한 교과서적인 작품인 <이창> 역시 호퍼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진가 제프가 엿보는 이웃집의 모습은 호퍼의 그림 Night Windows (1928), Room in New York (1932)와 닮았습니다. 이웃집을 계속 훔쳐보던 제프는 범죄로 의심될 만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Night Windows

Room in New York


<싸이코>


8. 싸이코 (Psycho, 1960) - 알프레드 히치콕


은둔형 살인자 노먼 베이츠의 저택은 호퍼가 그린 The House by the Railroad (1925)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그림은 영화 <자이언트>(1956)의 제작진이 베네딕트 가를 묘사할 때에도 참고했습니다.


The House by the Railroad


<정사>


9. 소외 3부작 - 정사, 밤, 일식 (L’avventura, La Notte, L’eclisse, 1960~1962)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도 호퍼의 작품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아예 호퍼 작품의 느낌을 살려 무관심, 소통부재, 소외, 반목, 고독을 탐구하는 소외 3부작을 만들었습니다.


New York Movie (1939)에 등장하는 외로운 여자, Summer Evening (1947)의 커플, Sunlight in a Cafeteria (1958)의 이방인등이 안토니오니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New York Movie

Summer Evening

Sunlight in a Cafeteria


<자브리스키 포인트>


10. 자브리스키 포인트 (Zabriskie Point, 1970)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60년 중반 프로듀서 카를로 퐁티와 계약한 뒤 안토니오니 감독은 MGM에서 세 편의 영어 발성 영화를 만듭니다. 그중 두번째 영화가 <자브리스키 포인트>입니다. 여자 주인공 다리아는 캘리포니아 사막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남자 주인공 마크는 시위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경찰에 쫓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언제나처럼 안토니오니의 사랑이 마냥 행복할 리 없습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자유문화가 끝나갈 무렵 미국사회의 초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국 사막은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받은 것입니다. 또 이 영화는 핑크 플로이드, 칼레이도스코프, 롤링스톤즈, 패티 페이지 등 다양한 당대 최고의 록 음악이 쓰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써스페리아 2>


11. 써스페리아 2 (Deep Red, 1975) - 다리오 아르젠토


재즈 피아니스트 마르크는 살인을 목격하고 기자인 지안나와 범인을 추적합니다. 두 사람은 더 많은 범죄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탈리아의 공포영화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역시 호퍼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타일을 한껏 살린 아르젠토 전성기 시절의 이 영화에서 호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세트 디자인입니다. 다양한 붉은 색상의 물체들이 세심하게 놓여 있습니다. 두번째는 파란색 바입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밤을 새는 사람들(Nighthawks)'을 연상시킵니다.


바 안에서 사람들의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경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들은 움직이지 않고 혼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윈도 쇼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Sunday (1926), Hotel Window (1955)에 등장하는 외로운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Sunday

Hotel Window


<투쟁의 그늘>


12. 투쟁의 그늘 (Hard Times, 1975) - 월터 힐


스포츠 범죄 드라마 <투쟁의 그늘>은 대공황 시절 뉴올리언즈에서 불법 격투기 시합을 하는 남자 채니의 이야기입니다. 빛과 장소를 묘사할 때 호퍼의 그림 느낌이 묻어납니다. 월터 힐의 다른 영화 <드라이버>(1978)에도 범죄가 발생하는 도시의 밤 장면에 호퍼의 영향이 엿보입니다.


<천국의 나날들>


13. 천국의 나날들 (Days of Heaven, 1978) - 테렌스 맬릭


호퍼의 작품 The House by the Railroad (1925)에서 영감받은 영화입니다. 빌은 여자친구 애비에게 다 죽어가는 부유한 농부와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농부가 죽은 뒤 재산을 차지하겠다는 계산이죠. 이때 농부의 집은 호퍼의 그림과 닮았습니다. 사회로부터 고립돼 있는 밀밭에 둘러싸여 있는 집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14.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 감독은 직접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Nighthawks)'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이 그림을 재생산하려고 했다. 우리 제작팀은 이 그림을 참고해 일러스트를 그리고, 분위기를 비슷하게 가져가려 했다."


영화 속 미래도시는 콘트라스트 강한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덕분에 릭 데커드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선 이방인으로서 고립감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해밋>


15. 해밋 (Hammett, 1982) - 빔 벤더스


<해밋>은 독일 출신 빔 벤더스 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첫 영화입니다. 그는 이 영화를 호퍼의 작품을 탐험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영화는 작가 대실 해밋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라진 중국인 창녀 크리스탈 링의 추적에 나섭니다. 호퍼의 초기작인 Night Shadows (1921), House Tops (1921)에서 차용한 쇼트가 필름 누아르 장르 안에 녹아 있습니다.


Night Shadows

House Tops



<파리, 텍사스>


16.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1984) - 빔 벤더스


사막 한복판에서 형을 만난 트래비스는 4년 만에 가족과 다시 만납니다. 영화는 사막, 작은 마을, 식당, 바, 대도시 등 미국적인 풍경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호버의 작품과 닮았습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빚은 미국 문화에 대한 송시입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미국인 친구>(1977), <폭력의 종말>(1997), <돈 컴 노킹>(2006) 역시 호버의 작품에 영향받았습니다.


<블루 벨벳>


17.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 - 데이빗 린치


데이빗 린치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미술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에드워드 호퍼를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화가로 언급하곤 했습니다.


<블루 벨벳>은 그중 호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으로 꼽힙니다. 제프리라는 젊은 남자가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여자 가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아들은 사이코패스 프랭크에게 납치당한 상태였죠.


누아르적인 영상은 즉각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빛이 여러가지 다른 모양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어두운 누아르적 색감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영화의 공기를 만듭니다. 이러한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 조용한 교외의 가정에 감춰진 고독과 광기가 드러납니다.


<트루 스토리>


18. 트루 스토리 (True Stories, 1986) - 데이빗 번


텍사스의 한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재미있고 위트있고 아이러닉한 영화에도 호퍼 작품의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는 사람과 장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관찰하는데 이는 호퍼가 캔버스에서 한 일과 닮았습니다.


한 카우보이가 마을을 안내합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텍사스는 급성장하면서 지나친 소비주의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의 가치관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도시화의 뒤편을 돌아보는 바로 이 부분이 호퍼의 주제와 겹칩니다.


<로드 투 퍼디션>


19. 로드 투 퍼디션 (Road to Perdition, 2002) - 샘 멘데스


대공황 시대 활약한 아이리시 마피아의 이야기를 그린 <로드 투 퍼디션>의 촬영은 호퍼의 빛에 빚지고 있습니다. 특히 호퍼의 작품 중 New York Movie (1939)에서 크게 영향받았습니다.


이 영화에 호퍼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식당, 중산층 아파트, 텅빈 거리 등 촬영지부터 인물의 신체 일부가 숨겨지는 조명의 사용, 때로는 얼굴의 표정을 감추는 조명 등은 호퍼의 그림에서 따온 것입니다.


<르 아브르>


20. 르 아브르 (Le Havre, 2011) - 아키 카우리스마키


젊은 시절 작가였다가 지금은 구두를 닦는 마르셀은 아프리카에서 온 불법 난민 이드리사를 숨겨줍니다. 소년을 쫓는 마을 경감 모네가 수사망을 좁혀오고 마르셀은 소년을 구하기 위해 행동을 시작합니다.


핀란드 출신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주로 리얼리즘에 기반한 영화를 찍습니다. 코미디나 스릴러 등 장르영화일 때도 항상 리얼리즘이 바탕이 됩니다. 그는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인물을 몰아넣고 지켜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듭니다. 세트, 쇼트 디자인, 사물의 배치, 질감과 컬러 등에서 그의 영화는 호퍼의 캔버스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자화상


이외에도 허버트 로스 감독의 <페니스 프롬 헤븐>(1981),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2003) 등이 호퍼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영화들입니다. 호퍼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재현한 노만 메일러 감독의 <터프가이는 춤을 추지 않는다>(1987)도 있습니다.


참조:

20 Great Movies Inspired by Edward Hopper’s Painting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Edward Hopper's Paintings and Cinema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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