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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발표된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작 명단에서 눈길을 끈 작품 중 하나는 <컨택트>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14개 부문 후보에 오른 <라라랜드>의 싹쓸이를 막을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다.



철학과 과학을 접목한 기발한 상상력으로 최고의 하드 SF 작가로 추앙받는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1998)를 캐나다의 떠오르는 거장 드니 빌뇌브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컨택트>(원제는 'Arrival')는 원작 소설 만큼이나 지적인 SF 영화다. 언어학과 물리학을 넘나드는 복잡한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어 거의 영화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소설을 군더더기없는 영상 언어로 옮겼다. 외계 생명체를 만나는 과정의 긴장과 설렘을 넘어 미지의 존재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인생의 의미까지 묻는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3가지 포인트를 짚어봤다.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문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


1. 외계 생명체를 마주한 인간의 첫 번째 질문은?


영화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병에 걸린 딸 한나를 잃고 실의에 빠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강의를 하러 대학에 간 루이스는 학생들이 호들갑스러운 TV 보도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보지만 관심이 없다. 곧 학교 폐쇄 조치가 내려지고 루이스도 그 사건의 정체를 알게 된다. 거대한 반구형 쉘 12개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이다. 시큰둥한 루이스에게 미국 정부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뛰어난 언어학자가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루이스는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과 함께 쉘 안으로 들어가 7개의 촉수가 달린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heptapod)와 마주한다.



외계 생명체를 마주한 인간의 첫 번째 질문은 뭘까? 트럼프를 아십니까? 아주 단순하게도 그것은 "당신들 여기 왜 왔나요?"다. 친구인지 적인지 밝히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종을 만나면 항상 멸종시키거나 복종시켜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그들과 싸워야할지 궁금해한다.


루이스는 질문하기 위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려 한다. 다른 SF 영화였다면 적당히 얼버무렸을 이종 간의 소통 과정에 영화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럼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장면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관객 역시 새로운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필수다.



2. 심오한 스토리의 비밀 밝혀줄 두 가지 이론은?


헵타포드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언어 체계를 배우는 과정에서 루이스는 자신이 점점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난해한 과정을 받아들이려면 언어학과 물리학의 두 가지 이론을 알고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다. 언어학자인 사피어와 워프는 시간 구분이 뚜렷한 유럽 언어와 달리 시제가 분명하지 않은 호피족의 언어를 연구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이 가설을 적극 구현한다. 인간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의 언어는 선형적인 반면 헵타포드의 언어는 비선형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언어는 시계열을 따르지 않고 한 문장 안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될수록 루이스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는 기막힌 반전을 만들어낸다.



둘째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다. 17세기 수학자 페르마는 빛이 최단 시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로 움직인다는 것을 규명했다. 빛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 물 같은 매질에 부딪히면 굴절된다. 이 굴절 현상은 빛이 최단 경로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페르마의 원리다. 또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이 어떤 매질에 부딪혀 휘어지면 시간도 휘어진다. 원작 소설은 이 물리법칙을 응용해 만든 스토리이고 영화는 이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테드 창은 소설에 이렇게 썼다. "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한다."


원작 소설 작가 테드 창


헵타포드의 언어라는 매질에 갇힌 루이스는 자신이 이미 결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이미 정해진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한 사람의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 '인생'은 곳곳에서 굴절돼 결국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목적지를 이미 알게된 삶도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빅 퀘스천'으로 나아간다.



3. 미국을 능가하는 슈퍼파워는 중국?


영화에서 12개의 쉘은 공교롭게도 주요 강대국들의 상공에 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다. 그중 영화에서 미국 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의 리더는 외계 생명체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미국 언론은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 이를 따를 것이라고 보도한다. 영화 속 배경은 중국이 세계 유일 슈퍼파워가 된 미래다. 미국은 그저 중국의 결정을 지켜볼 뿐이고 오직 루이스만이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이 영화는 미국을 능가하는 슈퍼파워로 그린다는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미국에 드리워진 '중국포비아'를 영리하게 이용한 덕분인지 영화는 미국에서 제작비 대비 2배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미지의 외계 생명체가 지구로 찾아온다는, 어쩌면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로 테드 창이 쓴 소설의 제목은 '네 인생의 이야기'다. 제작과정에서 영화의 제목이 바뀌긴 했지만 의도는 그대로다. 즉, 이 영화는 한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담는다. 외계인이든 다른 인간이든 타자와의 소통은 언제나 인내를 필요로 한다. 영화는 그 인내하는 소통의 과정 속에서 우리 인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 만난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는 과정은 <미지와의 조우>(1977), 실의에 빠진 한 여성의 고군분투라는 점은 <그래비티>(2013), 쉘 안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는 장면은 <콘택트>(1997), 실제 물리학의 법칙을 응용했다는 점에선 <인터스텔라>(2014), 미지의 지적 생명체를 탐구할수록 환영을 보게 된다는 설정은 <솔라리스>(1972)를 떠오르게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정교하게 짜인 스토리를 통해 인생과 시간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는데 있다. 수미쌍관형 서사 구조로 영화적 경험과 스토리가 맞물리는 엔딩에 이르면 아마 당신은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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