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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멜로드라마를 재발명했다고 추앙받는 스페인의 거장. 성과 죽음을 주제로 파격과 도발을 장르 안에 녹여내는 스타일리스트. 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 주체적인 영화를 만드는 게이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앨리스 먼로. 우리 시대의 체호프로 칭송받는 단편소설 거장.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로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단순하고 평온한 일상을 감정을 배제한 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가.


앨리스 먼로


두 거장이 만났다.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20번째 장편영화로 먼로의 소설집 '런어웨이'를 택했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소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을 각색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애초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를 영어 대사로 만들어 1980년 데뷔 이래 최초로 미국 진출할 계획이었다. 가제는 '침묵(Silence).' 주연 배우로 메릴 스트립을 낙점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영어로 연출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캐스팅도 변경했다. 영화 제목도 '줄리에타(Julieta)'로 바뀌었다.



두 거장의 만남은 어떤 결과물로 탄생했을까? 알모도바르의 강렬한 색깔과 먼로의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었을까? 아니면 원작과 영화의 완성도는 반비례한다는 속설에 따라 이도저도 아닌 작품이 되었을까? 17일 개봉한 영화 '줄리에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2년 동안 딸과 연락이 두절됐지. 매년 생일날 엽서 하나 받는 게 전부야."


새 남자친구를 따라 마드리드를 떠날 결심을 굳힌 중년의 훌리에타(영화 제목은 '줄리에타'지만 스페인어 발음을 따라 '훌리에타'라고 적습니다)는 우연히 거리에서 딸 아니타의 옛 단짝친구 베아트리즈(미셸 제너)를 만나 12년 동안 행방을 알지 못했던 딸의 소식을 듣는다. 딸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마드리드에 남기로 한 훌리에타는 아니타의 아빠 소안(다니엘 그라오)을 처음 만났던 30년 전을 회상한다.


영화는 훌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 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액자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젊은 시절 훌리에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소안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그들의 사랑은 누군가의 죽음과 연결돼 있다. 영화는 훌리에타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쫓으면서 아니타가 엄마를 떠난 이유를 조금씩 드러낸다.



알모도바르의 도발적 섹슈얼리티와 죽음, 먼로의 인생을 바꾸는 작고 평온한 이야기. 두 거장이 평생 천착해온 주제는 이처럼 이질적이다. '줄리에타'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작은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는 먼로의 주제의식이 전체 스토리를 구성하는 가운데 중간중간 섹스 혹은 불륜과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사건이 발화되는 식이다.


영화는 훌리에타가 입은 빨간색 옷의 주름진 부분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여느 알모도바르 영화처럼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오프닝이다. 빨간색은 훌리에타의 주체적인 성을 상징한다. 그는 남자에게 먼저 대시하고 항상 자기주도적인 섹스를 한다.



훌리에타는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데 중년은 엠마 수아레즈, 젊은 시절은 아드리안나 우가르테가 맡았다. 우가르테의 하얗게 염색한 매력적인 단발머리는 수아레즈로 넘어가면서 자연미를 더한다. 그런데 두 배우가 바뀌는 시점이 묘하다. 마치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서 콘치타 역을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맡은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시간이 별로 흐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배우가 바뀐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외모가 다른 콘치타는 존재만으로도 남자가 가진 욕망의 원형 그 자체를 상징했다. 훌리에타 역시 누군가의 여자친구나 엄마를 넘어 여성 그 자체를 상징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상징과 이미지에 비해 영화의 스토리는 약하다. 애초에 먼로의 소설이 기승전결이 뚜렷한 방식으로는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먼로는 무섭도록 차갑게 묘사했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차가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늘 뜨겁고 논쟁적인 영화를 만든다. 그의 가장 가정적인 드라마인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조차 트랜스젠더 남편을 등장시킬 정도로 파격을 일삼았던 감독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살짝 겉돈다. 사건이 벌어질 때 훌리에타의 반응은 있지만 그 감정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여운이 오래 남아야 할 엔딩은 또다른 서스펜스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스토리상 반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은 지점에서 영화는 성급히 끝난다. 그렇게 먼로의 글은 알모도바르의 영상으로 해석되지 못하고 공중분해되었다.


사실 알모도바르의 전성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였다. 20대에 직장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한 그는 1980년대 기존 영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쏟아내 유럽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완성도가 높아지고 성숙해져 여러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고 마침내 거장 칭호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70살에 가까워진 최근에는 작품마다 기복이 심해지고 있다.


'내가 사는 피부'(2011)


'아임 소 익사이티드'(2013)


'줄리에타' 이전의 두 작품은 완성도의 극단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피부'(2011)가 실험성 충만한 걸작이었다면 '아임 소 익사이티드'(2013)는 괴작이었다. 전작은 신체 변이와 정체성이라는 그가 젊은 시절 다루었던 주제에 히치콕식 서스펜스를 자유롭게 변형해 만든 장르 하이브리드 영화였고, 후자는 기체 결함으로 위기에 처한 비행기를 무대로한 뮤지컬 코미디였다.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려 전작이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후자는 철저히 외면받는 재앙으로 끝났다.


'줄리에타'를 통해 그는 '비밀의 꽃'(1995)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2006) 등 과거 성공을 거두었던 여성 중심 가족 드라마 방식으로 먼로식 절제된 감정 묘사를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과장된 상황, 단순한 인물, 급작스런 사건 진행에 익숙한 알모도바르는 먼로의 스타일을 잘 흡수하지 못한다. 어쩌면 먼로의 글은 역시 여성 중심 영화를 만들었던 미조구치 겐지나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같은 감독의 스타일로 연출했어야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다.



'줄리에타'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설정 중 하나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했다는 이유로 영화 속 모든 여성들이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이 납득할 수 없는 설정을 영화는 밀어붙이지만 설득당하기에는 이야기의 층위가 두텁지 못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알모도바르는 이미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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