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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날아가던 새들은 하늘에 그대로 떠 있고 밀려오던 파도는 그대로 멈춘다면? 성민(강동원)은 신나게 마을을 돌아다닌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돈을 훔치고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놓는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그는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낮도 밤도 없는,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는 기약없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는 많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타이밍' 혹은 '캐시백' 같은 영화에선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잠깐 동안 시간을 멈추는 주인공이 등장했다. 하지만 영화 '가려진 시간'은 이 설정을 극대화한다. 멈춘 순간을 길게 늘어뜨려 거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멈춰버린 시간에 갇힌 성민은 마치 '그래비티'의 우주비행사처럼 완벽히 혼자다. 그는 세상 속으로 귀환하려고 노력하지만 시간은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영겁같은 시간이 오직 그에게만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성민은 자신의 얼굴도 세상의 원래 모습도 잊어버린다. 자살충동이 일 때마다 그는 첫사랑 수린(신은수)만을 생각하며 버틴다.
16일 개봉을 앞둔 영화 '가려진 시간'은 초자연적인 상황에 놓인 남자의 이야기에 순애보를 결합한 영화다. 성민의 한 여자만을 향한 진심은 영화 '늑대소년'의 철수를 닮았고,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에 놓인 두 남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연상시키며, 한없이 시간을 늘어뜨려 사는 남자라는 점에선 '인셉션'이 떠오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강점은 시종일관 눈을 즐겁게 하는 영상에 있다. 카메라는 영화 속 섬마을과 조각같은 배우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다. 특히 시간이 멈춘 순간은 마치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황홀하다. 물방울이 튀어오르고 물체가 중력을 무시하고 떠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성민이 무중력공간을 탐험하는 것처럼 신세계가 펼쳐진다.
세상은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지만 멈춰놓고 보면 그 시간의 단면은 이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속에 홀로 남은 성민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혼자만의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아무리 멋진 광경도 교감할 사람이 전혀 없다면 그 인생은 의미를 찾기 힘들 것이다. 성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 수린과 주고받았던 두 사람만의 언어와 비누 조각을 통해 멈춘 시간 밖의 수린과 소통한다.
영화의 제목인 '가려진 시간'에서 '가려졌다'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가림의 주체를 상정한다. 이 영화에서 훌쩍 나이들어버린 성민의 시간을 가린 것은 마을 주민들의 불신과 이성에 대한 맹신이다. 아주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성민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되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성민은 자연과 세상에서 동시에 버림받는다. 영화는 그 순간을 수린의 시점에서 감성적으로 절절하게 포착해낸다.
'가려진 시간'은 '잉투기'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엄태화 감독의 세번째 영화다. 전작처럼 이 영화 역시 기존에 보여지지 않은 영상을 선보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미지에 신경 쓰느라 초반부 영화가 다소 루즈해진 점은 아쉽다.
성민 역을 맡은 강동원은 때론 '늑대소년'의 송중기처럼 보이고 때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브래드 피트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가장 익숙한 강동원의 장난기어린 모습은 그가 멈춘 시간을 휘젓고 다닐 때 볼 수 있다.
수린 역을 맡은 15세의 신예 신은수는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조숙하고 감정 풍부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는 성민 역의 아역배우 이효제와 투 샷으로 잡힐 때도 잘 어울리고, 성인 배우 강동원과 함께 있을 때도 주눅들지 않고 제몫을 해낸다. 충무로는 김유정과 김소현의 뒤를 이어 또다른 스타로 커나갈 수 있는 잠재력 큰 유망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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