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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와 같은 날인 9월 28일 개봉한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이하 '미스 페레그린')이 초반 홍보 부족과 3배 가까이 벌어졌던 스크린 수 열세를 만회하고 박스오피스 1위로 올라섰다. 개봉 첫주 물량공세를 쏟아붓는 규모의 경제가 좌우하는 영화산업에서 초반 크게 밀린 영화가 이를 뒤집는 것은 드문 일이다.
관객은 한국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영화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욕설과 피가 난무하는 '아수라'는 지나치게 마니아 취향의 영화이고 대중은 오랜만에 대작으로 돌아온 팀 버튼을 환영했다.
아이의 마음으로 어른의 영화를 만드는 버튼은 할리우드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이지만 최근 작품들의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공들여 만든 '다크 섀도우'(2012)가 실패한 이후 예산을 확 줄인 '빅 아이즈'(2014)는 평단의 호평에도 큰 반향을 얻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영화 '미스 페레그린'은 버튼이 절치부심하며 내놓은 예산 1억1천만달러의 대작이다. 랜섬 릭스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해 제작 전부터 버튼이 만드는 '아이들판 엑스맨'으로 화제를 모았다. 영화 '엑스맨'의 자비에 영재학교처럼 '미스 페레그린' 역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집이 배경이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영국 웨일스의 한 섬마을에서 독일군의 공습 전날을 무한반복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린다. 이들은 시간을 되돌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미스 페레그린(에바 그린)의 보호 아래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날 16세 소년 제이크(아사 버터필드)가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시간을 뛰어넘어 이들의 집을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원작 소설은 '트와일라잇' '헝거게임' '다이버전트' 시리즈처럼 영어덜트(Young Adult: 10대말~20대초)를 대상으로 한 출판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다른 영어덜트 소설처럼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묻어난다. 버튼은 이 작품을 영화화하며 어두움을 줄인 대신 한 외톨이 소년이 리더로 변화하는 과정을 강조했다. 그래서 '미스 페레그린'은 소년 제이크의 성장영화처럼 보인다.
버튼의 영화는 늘 캐릭터로부터 시작한다. '배트맨' '가위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 '스위니 토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그가 만든 영화의 제목들은 대부분 주인공의 이름이다. '미스 페레그린' 역시 마찬가지다. 신비의 능력을 가진 페레그린과 그녀의 아이들은 제이크를 매혹시킨다. 버튼은 영화를 구상할 때 캐릭터를 오래 들여다보면서 그에 공감하는 과정 속에서 비주얼과 이야기를 끄집어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보다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공기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소녀, 눈으로 꿈을 상영하는 소년, 손으로 불을 만드는 소녀, 뒷머리에 입이 달린 아이, 괴력을 가진 아이, 투명인간 소년 등 '미스 페레그린’에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고아들이 등장한다. 애초 소설가 릭스가 이들을 구상한 계기는 20세기 초에 촬영된 흑백 스냅사진이었다고 한다. 팔다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촬영된 사진 등을 보며 릭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버튼은 이 캐릭터들을 다시 자신만의 비주얼 속에 담았다. "이미지가 곧 이야기"라고 말하는 버튼은 어떤 원작 소설도 자신만의 비주얼로 해석해낸다.
팀 버튼 감독
버튼은 어린 시절 정규수업을 받는 대신 혼자 기이한 캐릭터들을 상상하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자랐다. 고딕양식 건물, 얇고 길죽한 팔다리를 가진 괴물, 눈이 큰 아이 등 소위 '팀 버튼 세계' 속 캐릭터 유형은 대부분 이때부터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들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디즈니가 그를 발탁했으나 정해진 틀에 갇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그는 디즈니와 결별한 뒤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빈센트' '프랑켄위니' '비틀쥬스' 등 초기작부터 선보인 그의 독창적인 비주얼은 환갑을 앞둔 지금 그의 영화 속에서도 여전하다.
우연히 같은 날 개봉하며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사실 '아수라'와 '미스 페레그린'은 장르도 성격도 전혀 다른 영화다. 그러나 두 영화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암울한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아수라'의 배경은 부정부패가 판치는 가상의 도시이고, '미스 페레그린'은 나치 독일군이 폭탄을 떨어뜨리는 2차대전 와중이다.
우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밑바닥으로 치닫고 다른 한 영화는 막연한 희망을 향해 달려간다. 감정이입이 불가능한 악당들이 핏빛 총격전으로 스크린을 암울하게 수놓는 '아수라'와 달리 '미스 페레그린'은 선과 악이 뚜렷하고 결말은 열려 있다. 현실에서 도피해 안온하게 살던 아이들은 위협에 처하자 포기하지 않고 용기 내어 괴물에 맞서 싸운다. 미스 페레그린이 그들을 지켜주기 힘들게 됐을 때에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아간다.
어쩌면 지금 극장가에서 '아수라'가 지고 '미스 페레그린'이 뜨고 있는 이유는 관객들이 현실을 무작정 비관하기보다 아직 변화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고 믿고싶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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