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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을 하는 남자가 있다. 겉으로는 번듯한 회계사지만 그는 마피아의 돈세탁을 도와주며 받은 돈과 금괴를 집 안에 숨겨놓고 산다. 자폐증을 갖고 태어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지만 서번트 증후군으로 천재적인 수학적 소질을 갖췄고 남들에게 놀림감이 되지 않길 바란 아버지의 훈육으로 엄청난 무술 실력까지 연마했다. 그는 상장을 앞둔 한 기업의 장부를 분석하다가 수천만달러의 돈이 어디론가 증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무부 요원과 청부살해업자가 그를 뒤쫓는 와중에 그는 그에게 마음을 연 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침투한다.
어찌보면 뻔한 줄거리다. 건드려선 안되는 남자를 건드렸다는 이야기는 '테이큰' '레옹' '아저씨' 등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13일 개봉한 영화 '어카운턴트'를 좀 더 파헤쳐 보자.
자폐증을 가진 슈퍼히어로 회계사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찬 울프(벤 애플렉)는 자폐아로 태어나 회계사가 된 남자다. 자폐증을 가진 사람은 2000명 당 한 명 꼴로 우리 주위에 존재하지만 사회 적응력이 부족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자폐증은 자기 자신에게 심하게 몰입하는 증상으로 이들 중엔 10%의 비율로 수학과 예술 등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경우가 존재하는데 모차르트, 베토벤, 아인슈타인, 에디슨, 반 고흐, 루이스 캐럴 등도 자폐증을 갖고 있었다. 영화 '레인맨'의 암기천재 역시 실제 킴 픽을 모델로 했다.
영화 '어카운턴트'는 이들을 또다른 슈퍼히어로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특별난 재능을 갖춘 이들이 때로는 보통 사람 5~6명 분의 몫을 해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울프의 어린 시절을 현재와 교차편집하며 설득에 공을 들인다. 엄마가 떠난 뒤 혹독해진 아버지, 우애 좋은 동생과의 관계 속에서 그는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숨겨진 것을 찾고 균형을 맞추는 직업." 영화 속에서 울프가 말하는 회계사에 대한 정의다. 영화가 특출난 능력을 지닌 자폐아의 직업으로 회계사를 택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는 항상 균형을 생각하며 살았고 무술과 함께 회계를 또다른 무기로 택했다. 그는 헤비메탈과 클래식을 동시에 듣고 C. M. 쿨리지의 '포커 게임을 하는 개'와 잭슨 폴락의 추상 미술 작품을 함께 보면서 균형을 생각한다. 이처럼 영화 '어카운턴트'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 플롯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한 자폐아의 가능성에 주목한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중성 그린 세심한 액션 스릴러
영화는 하나의 조각을 맞추면 다음 조각이 연쇄적으로 맞춰지는 퍼즐처럼 구성돼 있다. 회계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왜 마피아와 협력해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악당인지 영웅인지 등 초반에 의아했던 것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실타래가 풀린다.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액션이 시작된다. 이때 악당과 싸우는 울프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돼 있다. 숫자로 말하는 회계사라는 직업을 몸으로 표현하듯 깔끔하다. 상대방은 빠른 동작과 급소 한 방에 무너지고 그는 두 번 세 번 복기하는 회계 업무처럼 쓰러진 자를 향해서도 잊지 않고 확인사살한다.
재무부 요원 레이 킹 역을 맡은 J. K. 시몬스
건조한 액션 사이의 간극은 인물들의 감정이 메운다. 비단 울프 뿐만 아니라 그를 쫓는 재무부 요원 레이 킹(J. K. 시몬스)에 대한 묘사도 사실적이다. 그는 여느 액션 스릴러에서처럼 정의감 투철한 유능한 요원이 아니라 겁 많고 무능한 요원이다. 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로서 아이 키우는 것 만큼은 잘했다고 믿는 평범한 가장이다. 은퇴를 앞둔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끝내기 위해 울프를 쫓는다. 자폐증을 가진 회계사와 겁 많은 요원, 두 사연 많은 인간의 이중성은 익숙한 플롯을 신선하게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관객의 시선을 잡아 끈다.
영화의 감독은 개빈 오코너로 미국 아이스하키팀의 올림픽 우승을 그린 '미라클'(2004),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두 형제가 링 위에서 맞붙는 권투영화 '워리어'(2011)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재능을 가졌는데 스토리에 힘을 주기보다 캐릭터를 강조하고 감정선을 끌어올리는 것이 강점이다.
울프 역을 맡은 벤 애플렉은 배우와 감독으로 두루 활약하고 있는 할리우드 능력남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울프는 애플렉의 수줍어하는 미소 덕분에 영웅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는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새 배트맨으로 등극했는데 '어카운턴트'는 그가 '저스티스 리그'에서 다시 한 번 배트맨을 연기하기 전에 찍은 영화다. 그래서인지 울프에는 배트맨의 이미지가 많이 겹쳐 보인다. 울프가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 중에 되뇌는 영국 동요 '솔로몬 그런디'는 DC코믹스의 악당 솔로몬 그런디를 연상시키고, 울프가 겪는 정신적인 문제와 이중생활도 배트맨과 닮았다. 어쩌면 '어카운턴트'는 배트맨의 좀더 현실적인 버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배트맨과 어카운턴트, 둘 중 하나의 속편이 나와야 한다면 실망스러웠던 배트맨보다 차라리 이 영화의 회계사를 본격적인 슈퍼히어로로 키워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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