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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마을에 복면을 쓴 은행강도가 나타난다. 아침에 두 곳 털고 점심 먹고 오후에 한 곳 더 터는 식으로 스케줄까지 짜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생계형 형제 강도다. '오션스 일레븐'처럼 첨단 기술로 무장한 조직이 폼나게 한탕하는 시대에 아날로그형 강도라니. 대체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11월 3일 개봉을 앞둔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리숙한 은행강도의 영업비밀
복면을 쓰고 은행에 잠입한 두 형제. 그런데 이들의 행동은 왠지 어리숙하다. 은행 직원이 내뱉은 '멍청하다'는 말 때문에 형이 말싸움을 벌이면 동생은 말리느라 바쁘고, 창구의 손님에게 빼앗은 권총을 멀리 치우지 않아 나중에 총에 맞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쉽게 잡히지 않고 도주 행각을 벌인다.
이들에겐 세 가지 영업비밀(?)이 있다.
하나, 인적 드문 텍사스 촌구석의 작은 지점만 노린다.
둘, 낱장의 지폐만 가져간다. 돈다발은 추적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손대지 않는다.
셋, 훔친 돈은 카지노에 가서 칩으로 바꾼 뒤 재환전해 돈세탁한다.
똑똑한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가 세운 계획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형 태너(벤 포스터)는 이를 무식하게 밀어붙인다. 감옥에서 출소한 형은 선량하게 살아온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은행강도가 됐다. 그렇다면 동생은 대체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걸까? 영화는 단서를 하나씩 던지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한물 간 보안관의 추격전
은행에 침입해 푼돈만 훔쳐가는 독특한 강도를 잡기 위해 보안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과 알베르토(길 버밍엄)가 나선다. 그런데 두 사람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다. 해밀턴은 은퇴를 앞둔 베테랑으로 마냥 낙천적인 성격에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체력이 부실하고, 알베르토는 코만치족 출신으로 해밀턴과 시종일관 티격태격한다.
영리한 형제와 한물 간 보안관. 이들은 영화 내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그 추격전이 참으로 텍사스 카우보이 식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도망가는 태너는 쫓기면서도 여유로워 보이고, 소처럼 느릿느릿 걷던 해밀턴은 범인을 기다리겠다며 하루 종일 폼나게 앉아 시간을 죽인다. 영화의 추격전은 이처럼 배짱 두둑한 사내들의 맷집 좋은 격투를 닮았다. 전개 빠른 서스펜스가 익숙한 시대지만 마치 서부극의 시대로 돌아간 듯 느린 템포는 이질적이어서 더 빨려든다.
두 형제가 은행을 턴 이유
영화가 중반으로 치달으면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절박한 사연이 드러난다. 영화는 그들의 절박함을 땀방울까지 묘사하면서 표현해낸다. 느긋함과 절박함 사이에서 영화는 균형을 잃지 않고 달려간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선에서 언급하자면, 토비가 은행강도를 계획한 이유는 은행에 저당 잡힌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과 관련 있다. 농장을 지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을 벌인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처지를 설득하기 위해 슬쩍슬쩍 이 땅의 역사를 보여주며 애초 이 땅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고 말한다.
코만치족 출신 보안관 알베르토(오른쪽)와 해밀턴
형제들이 은행을 터는 미국 뉴멕시코와 텍사스의 서부 지역은 1860년대 이전엔 코만치족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영화 속에서 코만치족 알베르토는 백인인 해밀턴을 향해 이곳이 150년전 자신들의 할아버지 세대가 살던 곳이라고 주지시킨다. 은행에게 땅을 뺏길 위기에 처한 태너는 이들에게 동화돼 "나도 코만치족"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인종에서 자본으로 주체만 바뀌었을뿐 되풀이되는 수탈의 역사 속에 무엇이 정의인지 묻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2012년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각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혔을 만큼 많은 영화사들이 탐냈던 각본이다. 작가인 테일러 쉐리단이 처음 지은 제목은 '코만체리아(Comancheria)'로 이는 코만치족의 땅을 뜻한다.
영화의 원제는 'Hell or High Water'
영화의 제목은 제작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뜻의 'Hell or High Water'로 바뀌었다. 이는 은행에 빚을 꼭 갚아야 하는 토비의 절박한 처지를 표현한 문장으로 극중 은행 직원이 형제를 향해 외치는 대사 속에 등장한다.
한국 개봉 제목인 '로스트 인 더스트'는 원제가 한국 관객에게 잘 와닿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수입사가 영화 속에 흐르는 텍사스 출신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레이 와일리 허바드가 부른 'Dust of the Chase'의 가사 중 한 문장에서 따와서 다시 만든 제목이다. 복잡한 과정이야 어떻든 이 한국 개봉 제목은 영화의 황량한 분위기와는 썩 잘 어울린다.
영화를 만든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은 분노조절 장애아의 교도소 생활을 그린 '스타드 업'(2013), 감각이 사라진 시대의 로맨스 '퍼펙트 센스'(2011), 엄마를 닮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소년 이야기 '할람 포'(2007) 등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밀하고 감각적인 터치로 그려왔다. '로스트 인 더스트' 역시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표현 방식은 마치 깊은 복선을 깔고 있는 문학작품을 보듯 더 세련되고 강렬해졌다.
곰처럼 움직이는 베테랑 보안관 해밀턴 역은 66세에도 여전히 주연을 맡는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다. 1971년 '라스트 픽처 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깜짝 데뷔한 이래 그는 40여년간 기복 없이 꾸준하게 할리우드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해 왔다. 똑똑한 동생 토비 역은 '스타트렉'의 커크 선장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 파인, 무대포 형 태너는 '인페르노'의 벤 포스터가 맡았다. 1980년생 동갑내기인 두 배우의 '케미'는 영화에 거친 남성미를 물씬 불어넣는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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