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부산행>에서 기차는 3개의 역을 지나간다. 천안아산역은 통과하고, 대전역은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지만 동대구역에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아예 멈춘다. 부산까지 가려면 승객들은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제목이 ‘부산행’인 이 영화의 열차는 왜 여기서 멈출까?


영화 <부산행> 일러스트


기차는 시작과 끝이 정해진 철로를 달리는 물체다. 철로를 벗어나면 큰 사고가 나기 때문에 기차의 역할은 정해진 철로를 성실하게 달려 끝에 도달하는 것이다. 파란색 라인을 따라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출발해 정해진 속도로 달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정확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기차는 시계의 탄생에도 공헌했다. 런던을 출발한 기차가 맨체스터에 언제 도착하는지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지역별로 시간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그리니치 표준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기차를 우리 인생에 비유하기 시작하면 답답해진다. 기차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해진 선로 외에는 달릴 수 없다. 이는 자유로워 보이는 우리 인생이 가족, 학교, 결혼, 직장, 은퇴, 장례 등 결국 정해진 선로를 따라가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기차의 속성인 정확성에 대한 기대는 우리 인생이 10대, 20대, 30대, 40대에 해야 할 일을 정해놓고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기차에게 그것이 효율성이라는 명분 하에 주어진다면, 인생에게 그것은 문화와 관습이라는 명분 하에 주어진다.



인생의 축소판인 기차는 당연하게도 인생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차를 타면 두 시간의 불일치 때문에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의 상대적인 속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속도감은 우리에게 감정의 커다란 진폭으로 드러난다. 기차가 달릴 때 우리는 시간이 압축됐다가 다시 이완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설렘과 두려움 등 여러 감정으로 변환된다.


우리는 좀처럼 기차에서 현재를 보지 못한다. 기차에서 보이는 풍경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다. 사람들은 뒤로 밀려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다가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미래를 상상한다. 출발할 때 우리는 도착지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도착할 때 우리는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에 당황한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한 사람 인생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두 개의 점이라면, 기차는 두 점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선이다. 선이 가느다란 이유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 외줄을 타는 것처럼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타임머신을 탄 시간 동안 때로는 감정 변화가 우리 인생의 궤도를 바꾸기도 한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이스탄불을 출발한 열차는 폭설로 인해 멈춘다. 그리고 이때부터 노련한 에르퀼 푸아로 형사의 추리가 시작된다. 가뜩이나 기차라는 좁은 공간인데 이 마저도 산속에 고립되어 있음으로써 밀실공포를 자극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기차라는 점과 점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최대한 확대해 인물들이 느낀 두려움의 작은 변화들을 들여다본 이야기다.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가운데 이성을 잃지 않는 뛰어난 형사만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탄 열차 역시 오리엔트 특급 열차 노선 중 한 구간을 달린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던 도중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내린다. 그리고 사랑이 시작된다. 목적지가 정해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급격하게 궤도를 수정해 다른 루트로 진입한 것이다.


이처럼 기차 안은 인생이라는 기차가 레일을 변경할 수 있는 인터체인지다. 정거장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수시로 내려야 할지 내리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성이 지배하던 평소와 달리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감정이 승리하면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눈을 감거나 혹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내리기도 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는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브론스키를 만난 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킬 중요한 결심을 한다. 안나는 사실 스스로 결심을 하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따라 기차 안의 풍경이 왠지 낯설게 보였고, 그래서 평소처럼 소설에 집중할 수 없었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안나 아르카지예브나는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했지만, 책을 읽는 행위,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반영을 쫓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


만약 안나가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브론스키가 있는 곳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어서 걸어서 집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흔들렸을까? 아마도 드라마틱하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차는 인생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왜곡시키고, 그 속에서 감정을 증폭시킨다. 설레임과 두려움이라는 감정 역시 그 속에서 튀어나온다.


다시 <부산행>으로 돌아와 보자. 열차는 왜 동대구에서 멈출까? 동대구 기차역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 <부산행> 일러스트


일단 대구와 기차를 연결시키면 13년 전인 2003년 대구 지하철참사가 떠오른다. 집단 트라우마는 노선 변경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대구 지하철참사는 192명의 희생자를 남긴 명백한 인재였다. 추모할 이유가 있는 곳에서 기차가 멈추는 것은 무의식의 발로다. 나조차도 모르게 잊혀진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내리지 않으면 기억은 다시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다. 눈 속에 고립된 '오리엔트 특급 열차'처럼 이제부터 범인이 누군지 꼼꼼히 따져보기 위해서는 내려야 한다. 그래서 기관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내리게 한다. 왜곡된 시간은 여기서 잠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KTX에서 내려 무궁화호 기관차로 갈아 탄다.


여기서 KTX와 무궁화호를 잠시 비교해보자. 공유가 애당초 KTX를 탄 것은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기차 안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시간의 왜곡이나 감정 변화를 거부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부산을 왕복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고, 체력을 보충할 수 있어서 KTX를 택했다. 이는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누구도 돈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무궁화호보다 KTX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동대구역에서 공유를 비롯한 네 명은 빠르고 효율적인 KTX에서 내려 무궁화호 기관차로 갈아탄다. 빠르고 쾌적한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멈추자 비로소 살인사건의 추리 혹은 뜻밖의 로맨스가 시작됐던 것처럼, KTX가 멈추고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에 내리자 비로소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유는 이기적이었던 자신을 반성하고 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내달리도록 설계된 KTX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는 이런 마음의 정리를 할 여유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공유의 죽음 이후에도 기차는 계속 달린다. 두 여자만 싣고 미지의 땅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부산에 못미처 다시 한 번 멈춘다. 두 여자(혹은 태아까지 세 여자)는 다시 한 번 기차에서 내린다. 지금까지 기차여행은 이들을 크게 변화시켰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이 겪은 것은 효율과 비효율 사이, 이성과 감성 사이, 개인과 집단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의지와 나약함 사이의 투쟁이었다. 이 트랙에서 저 트랙으로, 다시 또다른 트랙으로 인생의 궤도를 몇 번이나 수정해 여기까지 왔다.


영화 <폭주기관차>


<부산행>과 달리 영화 <폭주기관차>에서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추지 못한다. 기관사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하면서 열차는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폭탄이 되어 달릴뿐이다. 무법자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 매니는 탈옥해서 하필 이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다른 기차와의 충돌을 피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과정에서 그가 깔아놓은 인생의 레일 역시 선로를 변경한다. 그를 잡으러 쫓아온 교도관은 이렇게 묻는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매니의 대답은 이렇다.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차이가 있죠?" 그는 열차를 분리해 남은 승객을 살리고 자신은 죽음을 택한다.


<폭주기관차>의 기차가 멈추지 않음으로써 주인공 매니의 인생 선로를 변경시켰다면, <부산행>의 기차는 억지로 멈춤으로써 주인공의 인생 선로를 바꿨다.


영화 <부산행> 일러스트


만약 열차가 동대구에서 멈추지 않고 부산까지 진격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영화 속에서 부산은 좀비 청정지역이다. 군대가 컨테이너로 부산으로 오는 길목을 죄다 막아서 좀비에 뚫리지 않는 방어선을 형성했다는 것이 영화의 설정이다. 만약 KTX가 전속력으로 터널을 지나 돌진했다면 그곳에서 지키고 있던 군대도 열차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화의 엔딩은 결국 부산행 열차가 좀비 바이러스를 전국토로 확산하는 것이 된다. 좀비를 피해 부산으로 향했던 열차가 오히려 좀비를 싣고 부산으로 오는 셈이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를 막기 위해 기차를 동대구에서 멈췄다. 대구라는 지역이 가진 아픈 역사는 주인공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생의 레일을 발견하게 만드는데 상징성을 부여했다. 말하자면 영화는 대구라는 지역의 집단 트라우마를 이용해 주인공을 내리게 해 그의 인생 선로를 바꾼다. 지금까지 예로 든 영화나 소설에서와 달리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내린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기차에서 내리는 행위 자체가 인생의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기차가 멈춘다는 것은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 변화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일 수도 있고,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결심일 수도 있으며, 확실한 불안감 대신 막연한 안정감이 작동하는 시발점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인생 혹은 다른 이야기의 시작을 뜻한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기차를 타고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기차 안에서 미리 본 미래를 현실로 만들 것인지 혹은 지나간 과거를 현실로 만들 것인지 말이다.



유창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