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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두 편의 영화는 모두 '나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최근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책의 '저자 소개'를 쓸 때였습니다. 저는 학교나 회사로 제 소개를 대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직이 저를 대변해준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의 주제에 맞게 제가 창작을 시도했던 것에 대해 조금 썼습니다. 그런데 크게 성공한 적도 없었으므로 제대로 해낸 건 별로 없다고 적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보니 약간 후회가 들었습니다. 제대로 해낸 건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저자 소개에 굳이 왜 썼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책을 돈 주고 사보는 독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해낸 건 별로 없는 사람의 글을 읽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 소개를 어떻게 써야 할까 이런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한 것,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해낸 것을 적자. 그렇게 바꾼 저자 소개를 출판사에 다시 보냈습니다. 아마 (책이 잘 팔린다면) 2쇄부터는 바뀐 저자 소개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서두가 길어졌네요. 영화 <대니쉬 걸>과 <브루클린>에서 나를 찾아가는 두 인물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뒤늦게 발견한 진짜 성을 찾아가는 나, 대니쉬 걸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에 사는 화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풍경화를 그리는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초상화만 그리는 그의 아내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입니다. 어느날 게르다가 남편에게 여성 모델의 대역을 부탁하고 에이나르는 처음 스타킹을 신어본 그 순간 뒤늦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게르다는 처음엔 장난처럼 에이나르에게 릴리 엘베라는 여자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나중엔 릴리로 있을 때 진짜 자신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고 경악합니다.


영화는 최초의 트랜스젠더라고 알려진 실존 인물 릴리 엘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입니다. (영화 속 릴리는 젊어 보이지만 실제 릴리 엘베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1930년 47세였다고 합니다.) 한줄로 요약가능한 단순한 스토리라인임에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혹은 그녀)가 느끼는 혼란스런 감정을 얼굴 표정과 손짓, 그리고 발목(!)으로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어느날 릴리는 게르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에이나르를 죽이고 싶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다니고 있는 학교 혹은 회사,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위치, 관계 속에서 배당된 역할 등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입고 있는 옷과 배우자를 선택한 것 같지만 그것은 이 시대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정해진 선택지 위에서 제한적으로 고른 것일 뿐입니다. 다른 선택지를 지우고 나니 그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까요?



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성/여성으로 태어나지만 그것은 우리가 고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재된 성과 생물학적 성은 다를 수 있습니다. 사회는 편의상 우리를 한 가지 성으로 규정지으려 하지만 사실 완벽하게 남성이고 또 완벽하게 여성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남성적인 면, 그리고 여성적인 면이 골고루 있습니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호르몬인 에스토르겐은 나이에 따라 분비되는 양이 달라지고 이때마다 우리는 곧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혼란에 빠집니다. <대니쉬 걸>의 릴리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어느 트렌스젠더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이민자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나, 브루클린



1952년 뉴욕으로 이민 오는 한 아일랜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와 언니의 총애를 받던 에이리스(시얼샤 로넌)는 더 큰 세상으로 가길 바란 언니의 도움으로 뉴욕행 배에 오릅니다. 브루클린의 한 하숙집에 살면서 그녀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부기를 배웁니다. 언젠가 언니처럼 경리일을 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에모리 코헨)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합니다. 어느날 에이리스는 고향에서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는데 그곳에서 부유한 남자 짐(돔놀 글리슨)을 만납니다. 그녀는 편안한 아일랜드 생활을 뿌리치고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는 아일랜드 소설가 콜름 토이빈의 동명 소설을 영국 소설가 닉 혼비가 각색하고 존 크로울리가 연출했습니다. 크로울리는 2007년 범죄소년의 좌절을 섬세한 터치로 그린 <보이 A>를 만든 감독이죠. [어바웃 어 보이] [하이 피델리티(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익살스런 문체로 써온 닉 혼비의 스토리가 크로울리의 감성적인 화면에 담긴 영화가 바로 <브루클린>입니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 아일랜드계는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앤드류 잭슨, 윌리암 맥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우 윌슨,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리차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빌 클린턴 등은 모두 아일랜드계 미국 대통령이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 아일랜드계는 비주류이기도 합니다. 정통 앵글로색슨은 아니고 상당수 공사판에서 일하며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아일랜드 액센트의 영어를 쓰면 놀림을 받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인의 미국 이주 역사는 17세기 신대륙 발견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량 이주한 특정 시기가 있습니다. 1841~1860년의 20년 동안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무려 170만명의 아일랜드인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이주하던 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시체들이 즐비한 배는 '장례선'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910년엔 뉴욕의 아일랜드인이 더블린의 아일랜드인보다 더 많아졌을 정도로 아일랜드인은 고향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대략 3400만명의 아일랜드계가 살고 있는데 이는 미국 전체 인구의 10%에 달합니다. 아일랜드 인구가 600만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알 수 있죠.)


미국으로 온 아일랜드인들은 대개 공사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철도, 수로 등 대형 인프라 공사현장에는 카톨릭 혹은 개신교 아일랜드인들이 많았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독일인 등과 결혼해 사실상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선언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중반이지만 영화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상 19세기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느껴보셨겠지만, 낯선 곳에서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됩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요리, 목공예 등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쓰는 친구를 사귀기도 합니다. 아무 이유없이 막연히 고향이 그리워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지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영화에서 에이리스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백화점 근무 시간에는 얼른 퇴근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고, 거리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으면 이 사람들과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 아무런 소속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혼자 있는 날에는 고향에 두고온 엄마, 언니 생각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세상으로 와버린 에이리스에게 떠나온 고향이 예전의 고향일 수는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일랜드를 떠나온 이유가 있었고, 잠시 향수에 젖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가 고향을 떠나온 이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녀는 선택해야 할 때 망설입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연기합니다. 혹시 아일랜드에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곳을 선택합니다.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을 선택하는 이 과정은 나의 민족 정체성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이 과정을 조심스러운 터치로 꽤 길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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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쉬 걸>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에이나르, <브루클린>에서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찾아가는 에이리스. 두 인물의 공통점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에이나르는 남성/여성 사이에서 괴로워하다가 하나를 선택하고, 에이리스는 아일랜드/브루클린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선택하고 나서 두 사람은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어쩌면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비로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두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유창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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