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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향 없이 표류하던 허약한 나라를 맡아서 9년 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놓고 떠났다.”
15세기초 영국을 통치한 헨리 5세에 대한 중세역사학자 찰스 로스의 평가다. 헨리 5세는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13년 즉위해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1415년 프랑스로 쳐들어가 아쟁쿠르에서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 샤를 6세를 굴복시켰다. 영국 공영방송 BBC가 2002년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할 때 72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헨리 5세가 이처럼 숭앙받는 이유는 아쟁쿠르 전투가 무려 5배에 달하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 수나 경제력 등에서 잉글랜드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도 잉글랜드군은 6000~9000명인 반면, 프랑스군은 2만~3만명에 달했다. 고된 원정길로 인해 잉글랜드군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치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만명이 사망한 반면 잉글랜드군은 고작 100여명의 사망자만 냈다. 잉글랜드의 압도적 승리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는 이 전투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에 따르면 승리의 배경에는 병사들의 희생과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특히 헨리 5세가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외치는 연설이 유명하다. “적은 우리,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형제들(band of brothers)이다.”
넷플릭스가 제작해 지난 1일 공개한 영화 ‘더 킹: 헨리 5세’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1944년 로렌스 올리비에, 1989년 케네스 브래너에 이어 이번 영화에선 라이징 스타 티모시 샬라메가 헨리 5세 역할을 맡았다. 섬세하고 여린 이미지의 샬라메는 유흥에 빠져 살던 왕세자에서 적의 장수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로 변해간다. 샬라메의 연약한 이미지로 인해 관객은 조마조마해하며 헨리를 따라가게 된다. 샬라메의 반대편에선 프랑스 왕세자 역할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패틴슨 캐스팅은 단연 신의 한 수다.
헨리의 절친인 존 팔스타프는 셰익스피어 희곡에선 헨리가 즉위한 뒤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내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하루 아침에 절대자가 된 헨리의 고독을 부각시키기 위해 팔스타프를 중용한다. 그는 헨리를 도와 아쟁쿠르 전투의 전략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팔스타프는 조엘 에저튼이 연기했는데 그는 직접 각본을 쓰며 이 캐릭터를 만들었고 영화의 제작까지 맡았다.
프랑스 왕세자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
존 팔스타프를 연기한 조엘 에저튼
영화는 아버지 헨리 4세(벤 멘델슨)의 호전적인 통치에 거역해 떠돌아 다니던 부랑아 헨리가 존경받는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매끄럽게 그린다. 왕실 귀족들은 애송이가 왕이 됐다며 경계하지만, 헨리는 옛 친구를 참수하며 과거와 단절하고, 프랑스에 대한 평화 제안이 능욕으로 돌아오자 과감히 전쟁을 감행하는 결단성을 보여주며 스스로 왕이 될 재목임을 증명하려 한다. 러닝타임은 2시간 20분으로 다소 길지만 진중하게 끌고 가는 연출력과 연기력이 훌륭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넷플릭스가 올해 공개한 작품 중 손꼽힐 만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고 평가도 좋은 편이다. 로튼토마토 관객 평점은 86%에 달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아쟁쿠르 전투의 재현이다. 비가 내려 진창인 좁은 전장에서 병사와 귀족, 심지어 왕이 뒤엉켜 백병전을 치른다. 말이 백병전이지 거의 개싸움과 다름없다. 지금까지 영화 속 중세 전투는 대부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멋지게 말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이 영화 속 전투는 전혀 다르다. 갑옷으로 몸을 꽁꽁 싸맨 병사들이 뒤엉켜 난장판을 벌인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수적 열세에 놓인 잉글랜드군은 갑옷을 벗어던지며 속도감을 높인 반면 프랑스군은 중무장한 갑옷 때문에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여기서 승패가 갈린다. 이 전투 장면은 고증에 따른 것으로 역사에는 이러한 백병전이 3시간 동안 계속됐다고 기록돼 있다.
영화 ‘더 킹: 헨리 5세’는 지난 10월 23일 일부 상영관에서 개봉해 극장에서도 볼 수 있다.
더 킹: 헨리 5세 ★★★☆
모두가 유약하다고 했던 젊은 왕,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까지.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1/27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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