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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둘째가 사랑받는 집안이 있습니다. 자식이 다섯이지만 모두들 둘째만 우러러봅니다. 둘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일비백'을 외치고 '엄지척'을 따라하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둘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둘째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둘째의 아류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째에 대한 향수는 더 깊어져 1991년생으로 만 28세가 된 둘째에게 새로운 3D 옷을 입혀주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 '터미네이터' 이야기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여섯째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다크 페이트'. 어두운 운명이라는 암울한 이름을 갖고 태어난 이 아이의 부모는 이름과 팔자가 반대로 간다는 속설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다크 페이트'는 태어난 과정부터 셋째, 넷째, 다섯째와 다릅니다. 굳이 핏줄을 따지자면 첫째, 둘째에 이어지는 적통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이하 '다크 페이트', 10월 30일 개봉)의 시작은 다섯번째 시리즈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라 코너를 에밀리아 클라크로 교체하고 존 코너를 악역으로 설정하며 기존 시리즈를 리부트한 이 영화는 3부작으로 기획됐을 만큼 기대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참패하면서 3부작은 무산됐고 클라크도 하차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이대로 소멸될 뻔한 터미네이터의 부활을 위해 나선 사람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입니다. 그는 터미네이터를 SF의 전설로 만든 영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이후 시리즈에서 손을 놓고 있다가 이번에 제작자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셋째, 넷째, 다섯째 영화를 다 무시하고 둘째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세 번째 터미네이터
카메론은 조 아베크롬비, 닐 애셔 등 유명 SF 소설가들을 초청해 아이디어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베크롬비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인 여성 캐릭터를 넣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다크 페이트'의 이야기 뼈대가 되었습니다. 시나리오 작업에는 '워킹 데드'의 찰스 이글리, '다크 나이트'의 데이비드 고이어 등 여섯 명의 베테랑 작가가 투입됐고 카메론이 최종적으로 다듬었습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한 T-800은 작가들 사이에서 빼자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카메론이 고집해 살아 남았습니다. 슈왈제네거는 터미네이터 그 자체인 만큼 시리즈에서 퇴장하더라도 어벤져스의 아이언맨에 버금가는 예우가 필요할 겁니다. 카메론은 T-800이 인간성을 갖게 된다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덕분에 슈왈제네거는 나이 든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무엇보다 '다크 페이트'의 신의 한 수는 '심판의 날' 이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린다 해밀턴의 복귀입니다. 해밀턴이 출연한 덕분에 영화는 '심판의 날'에서 바로 이어지는 시리즈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을 제외하고 할리우드에서 잠정 은퇴하고 조용한 삶을 즐기던 60대의 해밀턴은 '다크 페이트'에서 심판의 날 20년 후의 사라 코너를 직접 연기합니다. 현재 63세의 그녀는 "부끄럽게 돈 벌고 싶지 않다"며 촬영 전 1년 동안 피트니스와 호르몬 요법으로 몸을 만들었고, 미군 특전부대 그린 베레와 함께 훈련하며 근육을 키웠습니다. 나이 든 여성도 주연배우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카락도 일부러 은발로 염색했다는 그는 영화 속에서 터미네이터와 사이보그 퓨쳐솔저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는 실버 크러시 매력을 제대로 시전합니다.
'심판의 날' 20년 후 이야기
영화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마지막 장면 이후부터 시작합니다. 사라 코너는 사이버다인을 파괴했고, 이로 인해 스카이넷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고, 1997년 예견됐던 '심판의 날'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 채 평화를 즐깁니다. 하지만 스카이넷이 파괴됐음에도 존 코너를 제거하라는 임무가 삭제되지 않은 T-800이 존 코너를 끝내 찾아내 죽이면서 사라 코너는 슬픔에 빠집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멕시코시티의 도로와 주택가에 빛이 번쩍하더니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한 명은 사이보그 인간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 또 한 명은 신기술로 무장한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입니다. 미래 인공지능이 만들어 보냈다는 Rev-9의 목표는 공장노동자인 대니(나탈리아 레예스)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레이스는 대니를 보호하기 위해 2042년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왔습니다. 여기에 터미네이터 사냥꾼이 된 사라 코너와 20년간 인간이 되려 노력한 T-800이 합류하면서 영화는 대니를 지키려는 휴먼 드림팀과 Rev-9과의 대결로 나아갑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심판의 날’ 뛰어넘을까
'터미네이터'는 선견지명 SF로 통합니다. 인류와 전쟁을 치르던 스카이넷은 몇 년새 인공지능이 화두가 되면서 재조명 받았습니다.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는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스카이넷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며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다크 페이트'는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훨씬 더 강화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공지능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부터 감시가 일상화된 디지털 사회, 이민자, 여성 문제 등 요즘 이슈들을 거의 다 집어넣고 버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영화는 멕시코시티에서 미국 텍사스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자연스럽게 트럼프 정부가 국경에 세우고 있는 장벽이 떠오릅니다. 대니는 로봇이 일자리를 가로채 실직 위기에 처한 동생(디에고 라모스)에 맞서 관리자에게 항의하는데 현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어서 낯설게 보이지 않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세대가 다른 세 명의 여성이 힘을 합쳐 강한 남성(Rev-9)에 맞서 싸우는 구도는 이제 그리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요즘 할리우드에선 익숙한 캐릭터 설정이 되었습니다. 젠더 갈등에 이은 젠더 균형 맞추기는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스타워즈, 맨인블랙, 엑스맨 등 이제 웬만한 프랜차이즈 영화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고 있고 이에 대한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존 코너를 허무하게 죽이고 시작하는 '다크 페이트'는 그 절정입니다. '터미네이터 3: 라이즈 오브 머신'(2003)이 여성 터미네이터를 투입하며 섹시함을 강조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 영화에서 맥켄지 데이비스가 여성성에 대한 강조 없이 "나는 미래에서 온 군인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달라진 시대상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이스는 강화된 사이보그 인간입니다. 이스라엘 석학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추월하면(특이점이 오면) 인간은 기계와 결합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특이점 이후에 등장할 미래형 인간을 상징하는 셈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이처럼 돌아온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 집안의 기둥인 둘째의 명성을 이어받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여러 전략들의 집합체입니다. 둘째를 떠받드는 팬들에겐 린다 해밀턴과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28년 만에 다시 만나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향수를 자극할 것입니다. 액체금속형 로봇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골격 분리 기능도 갖춘 막강한 터미네이터 Rev-9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아 공포스럽게 느껴지던 '심판의 날'의 T-1000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크 페이트'의 연출은 마블의 R등급 코믹 히어로 영화 '데드풀'의 감독 팀 밀러가 맡았는데, 액션신을 리드미컬하게 배치하면서도 곳곳에 유머러스한 대사를 삽입해 긴장을 풀어줘 오락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심판의 날'을 오랫동안 추억하게 만든 매력 중 하나인 클라이맥스에서 강력한 한 방이 이번 영화엔 없다는 점은 아쉽게 남습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0/2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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