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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13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블랙머니'는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 등 사회고발 영화를 만들어온 정지영 감독의 15번째 영화다. 대형 은행 매각 과정에서 불법으로 의심되는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를 통해 그는 73세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연출가임을 증명한다.
조진웅이 연기한 양민혁 검사는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뒤 누명을 벗기 위해 배후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수조원이 투입된 대한은행 매각과정의 불법 정황을 알게 된다. 열혈 검사, 음흉한 부장, 똑똑한 변호사, 억울한 노동운동가, 탐욕스러운 관료 등 전형적인 직업군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캐릭터와 이해관계를 생생하고 날렵하게 묘사한 덕분에 영화는 드라마로써의 재미와 감독의 메시지라는 두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영화는 의문의 사건을 던져놓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가는 미스터리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경알못' 소시민 출신 양민혁 검사는 이 복잡한 사건의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관객과 경제사건의 거리감을 좁혀준다. 어려운 경제용어를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불가피한 상황에선 친절한 부연설명을 곁들여 관객과 눈높이를 맞춰가는데 뻔뻔하면서도 능글맞은 양민혁 캐릭터는 자칫 딱딱해질 법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타개하는데 안성맞춤이다.
혈기왕성한 주인공이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할 때 주변 인물들이 각자의 직업적 고민이 담긴 사연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반전을 계속 만들어내면서 영화의 플롯은 롤러코스터 같은 추진력을 얻는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9년간 계속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 과정 중 2011년말의 한 시기만 다룬 것도 영화가 집중력을 얻은 요인이다. 복잡한 사건을 단순화하기 위해 무려 6년간 매달려 작업했다는 시나리오가 빛을 발한 순간이다.
그동안 금융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청와대나 검찰에 비해 금융위원회나 경제부총리를 영화에서 보는 것은 매우 낯선 경험이다. 경제를 소재로 한 영화는 쉽게 만들기 어려워 대중성을 담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정지영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대중성을 잃지 않는 것이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밝힌 적 있다. '국가부도의 날'에 이어 '블랙머니'의 흥행 성공은 한국영화의 소재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를 본 뒤 실제 사건이 어떠했는지 궁금증이 일어날 독자들을 위해 영화와 실제 사건을 비교해봤다.
살인사건 실제 있었나
영화 도입부에 불륜 관계인 두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금융감독원 소속, 여자는 외환은행 소속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팩스를 보낸 것이 들통날까봐 안절부절못하고 곧바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팩스는 이후 영화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살인사건은 영화 초반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픽션이다. 하지만 결정적 팩스와 의문의 사망은 실제로도 있었다. 외환은행 매각이 본격화된 2003년 7월 21일 금융감독원은 외환은행으로부터 송수신인 이름이 없는 팩스 5장을 받았다. 나중에 외환은행은 이 팩스 작성자가 허태학 차장인데 2005년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당시 불법 정황 증거를 죽은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팩스 내용은 무엇이었나
팩스의 주요 내용은 외환은행 BIS(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6.16%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사원에 따르면 당시 외환은행 담당 수석검사역은 외환은행 BIS 비율을 9.14%로 파악하고 있어 논란이 증폭됐다.
BIS 비율이 중요한 이유는 론스타의 자격요건 때문이다. 은행법에 따르면 국내외 금융기관 혹은 금융기관 합작법인만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데 은행이 부실인 경우엔 비금융기관에도 매각을 허용하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BIS 비율 8%는 건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금감위는 팩스 내용을 바탕으로 외환은행을 잠재적 부실 기관으로 지정했고 이에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인수 이후에도 자격 조건 논란에 휘말렸다. 산업자본의 경우 은행 지분 10%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론스타의 자산 대부분이 산업자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2012년 1월 론스타의 외환은행 단순매각을 승인하면서 론스타를 산업자본으로 볼 근거가 없다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70조 은행을 1조 6천억에 꿀꺽했나
영화에선 대한은행의 가치가 70조원인데 스타펀드가 1조 6천억원만 내고 사들였다는 대사가 나오지만 당시 외환은행의 가치가 그 정도로 높지는 않았다. 외환은행은 당시 SK글로벌 분식회계와 카드사태로 인해 부실이 심각했기에 실제 가치는 수조원대였다.
론스타는 2003년 8월 외환은행을 1조3800억원에 인수했고 2012년 1월 하나금융지주에 3조 9157억원에 팔았다. 2007년 HSBC와 5조 9376억원에 매각 계약을 체결했지만 금융당국의 승인 지연과 글로벌 금융위기로 HSBC가 인수를 포기하면서 무산됐다. 론스타는 매각금액 차액 2조원에 금융비용과 세금 부과분을 더한 5조원을 물어내라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2012년 12월 한미FTA에 의거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투자자국가소송(ISD)을 제기한 상태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 인수자금을 댔나
영화에서 양민혁 검사는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인수자금의 상당 부분이 국내에서 국외 페이퍼컴퍼니를 거쳐 다시 국내로 들어온 것임을 알게 된다. 국내 투자자가 누구인지는 영화 플롯상 반전 요소로 작용하며 외압으로 방송을 금지시킬 만한 권력을 가진 모피아의 실체가 드러난다.
실제로 2015년 뉴스타파는 외환은행 인수에 사용된 론스타 펀드 자금 중 상당수가 국내 자금이라는 정황이 담긴 자료를 발견해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론스타 펀드에 수천만 달러씩 투자한 투자자들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처조카를 비롯해 론스타 코리아 전현직 임직원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뉴스타파는 2006년 대검 중수부가 이 자료를 갖고 있었음에도 덮은 것으로 의심된다고 보도했는데 영화는 이를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조한철이 연기한 중수부장 김남규는 양민혁이 찾아낸 증거를 바탕으로 이광주 전 총리를 소환 조사하지만 곧 사건을 덮어버린다. 2006년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특검으로 유명한 박영수 변호사였다. 이때 중수1과장은 최재경 전 민정수석이었는데 그는 2011년 외환은행 매각 당시엔 중수부장을 지냈다.
2012년 1월 금융위원회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단순매각을 승인한 이후 MBC PD수첩은 이 문제를 지적한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김재철 MBC 사장이 노조 파업을 빌미로 PD수첩을 폐지하면서 방송되지 않았다.
김나리도 허구 인물인가
영화에는 완전한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에서 모티프를 얻은 인물이 뒤섞여 있다.
우선 영화를 이끌고 가는 양민혁 검사와 김나리 변호사(이하늬)는 모두 허구의 인물이다. 특히 CK 로펌에서 대한은행을 변호하는 국제통상전문가 김나리는 조직과 개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직선적인 캐릭터인 양민혁을 보완해준다.
영화 속에서 스타펀드를 대리하는 CK 로펌은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실제로 론스타 매각 당시 국내 법률대리인은 김앤장이었다. 국내 로펌 순위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는 김앤장에는 정치, 법조계의 유명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론스타의 미국 내 법률대리인은 미국 최대 로펌 스캐든이었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 이후 2012년 12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5조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는데 이때는 세종 로펌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미국에선 시들리-오스틴(Sidley Austin LLP) 로펌이 소송을 맡았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국내 로펌 태평양과 미국계 로펌 아널드 앤 포터(Arnold & Porter)와 계약했다.
세종 로펌은 재판 준비과정에서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을 고문으로 영입했다. 윤씨는 2007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HSBC에 매각하기로 합의할 당시엔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이광주 전 총리(이경영)
한국영화 새 악역 모피아
모피아는 재무부(기획재정부의 전신)의 영문 약칭(MOF)과 마피아를 합성한 용어로 금융계에 진출한 재무부 출신 인사들을 가리킨다. 외환위기 때 실체가 드러나며 와해되는 듯했으나 이후 다시 뭉쳐 진보,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그들끼리 암묵적 카르텔을 만들어 요직을 장악해왔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영화에선 이경영이 연기한 이광주 전 총리가 모피아의 대부로 묘사된다. CK 로펌 대표(문성근)가 주최한 파티에는 은행장, 금감원장 등 금융계 핵심 인사들이 로펌 인사들과 어울려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그들은 "대한민국 경제는 우리가 움직인다"고 말하고, 3억원짜리 술을 마시고, 대통령의 전화를 단칼에 거절하기도 한다.
감독은 영화 속 모피아 구성원들이 당시 실존한 여러 인물들을 조합해 만든 캐릭터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은 2006년 6월 19일 감사원 감사를 받았는데 이때 감사원이 외환은행 경영진, 재정경제부, 금감위 관료가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도왔다고 발표하면서 검찰에 기소한 인물은 이강원 외환은행장, 변양호 금융정책국장 등이었다.
검찰은 이를 수사하면서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 이정재 전 금감위원장 등도 조사했지만 이들에게서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국가부도의 날' '블랙머니' 등 한국영화에 경제 소재 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모피아를 새로운 악당으로 설정함으로써 선명한 선악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꽤 자주 권력자를 악당으로 묘사하며 대중의 권력전복 쾌감을 자극하는데 모피아는 대통령, 국회의원, 재벌 회장 등 기존 권력자들에 비해 신선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영화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기억의 밤'을 만든 장항준 감독 역시 모피아가 등장하는 경제 소재 영화를 신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블랙머니 ★★★☆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토록 재미있게 풀어내다니.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1/2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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