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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미술관 하나는 도시를 살립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스페인의 빌바오가 대표적이죠. 쇠락한 공업도시였던 빌바오는 1997년 구겐하임이 들어선 이후 건축과 미술의 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파리의 퐁피두센터, 런던의 테이트모던도 도시의 분위기를 확 바꾼 미술관들입니다.


일본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도 마찬가지입니다. 2004년에 완공된 이 미술관이 들어선 뒤 가나자와를 찾는 관광객이 급증했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20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21세기 미술관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가나자와는 인구 46만6000명의 소도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사진 제공=21세기 미술관


21세기 미술관은 어떤 점이 특별할까요? 이 미술관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 레안드로 에를리히(Leandro Erlich)가 만든 설치미술 작품인 '수영장(The Swimming Pool)'입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수영장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관객 참여형 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1층에서 지하로 연결되어 설치된 이 작품은 1층에선 수영장 아래 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사람들이 보이고, 지하에선 수영장 위 사람들이 보입니다.



처음 이 작품을 대하면 착시효과인가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쉽게 원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표면에만 물이 있고 아래 쪽에는 물이 없는 구조인 것이죠. 물이 담긴 곳은 두께가 10cm정도라고 합니다. 수영장을 물로 입수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수평으로 이동해 들어갈 수 있게 해놓는 발상의 전환이 만든 창의성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또 수영장 아래에도 관객이 있어야만 이 기발한 작품의 의미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관객 참여형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인스타그램에서 이 수영장 사진을 보고 21세기 미술관에 대한 호기심이 급격하게 일었습니다. 순전히 이 수영장에 가기 위해 일본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가나자와 위치를 찾아보고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경로를 알아봤습니다. 성수기에는 에어서울에서 서울~도야마 직항을 운행하는데 지금은 비성수기라서인지 운행하지 않더라고요. 도야마에서 가나자와까지는 기차나 버스로 1시간(신칸센으로는 25분)이면 가기 때문에 가까운데 도야마로 갈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그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공항인 나고야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나고야에서 가나자와까지는 기차로 3시간 정도 걸립니다.


가나자와로 가는 시라사기 열차

승차권과 열차표를 함께 사야 합니다.


오전 8시 10분 비행기를 타고 나고야 주부국제공항에 9시 50분에 내렸습니다.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마친 뒤 10시 50분쯤 메이테츠선 열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내린 시간이 대략 11시 20분쯤. 이후 곧바로 JR라인 특급열차 티켓을 구입하고 가나자와까지 가는 11시 45분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 티켓이 6810엔이나 하길래 놀라서 티켓 오피스에 몇 번 확인했던 기억이 나네요. 신칸센은 이것보다 훨씬 비싸겠죠.


열차에서 잠들어 있는데 중간에 열차가 방향을 바꾸더라고요. 사람들이 다들 의자의 방향을 돌립니다. 저도 얼떨결에 일어나서 의자 방향 돌리고 반대로 앉았습니다. 열차가 경유하는 역이 조금 돌아가는 루트로 설계되어 있나 봅니다. 어쨌든 2시 50분쯤 가나자와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가나자와역은 역사 자체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정성들여 지은 건축물입니다. 현대적인 투명한 창문이 격자무늬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확 띕니다. 어쨌든 제가 가나자와에 온 이유는 21세기 미술관을 찾기 위함이므로 이제 역을 빠져나와 도시 지도를 펼쳐봅니다.


가나자와 역사


21세기 미술관은 가나자와역에서 호쿠테스 버스를 타면 20분 정도 걸립니다. 혹은 걸어가도 되는데 40분 정도 잡으면 됩니다. 저는 중간에 오미초 시장도 들러서 밥도 먹을 겸 걸어서 갔습니다.


이시가와현의 중심도시인 가나자와는 예로부터 쌀이 많이 생산된 도시로 풍요로운 땅이었다고 합니다. 사무라이들이 살던 도시였고, 한 번도 침략당하지 않은 도시여서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가 정치,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하면서 쇠락하기 전까지 일본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번성했습니다. 한국의 전주시와 자매도시를 맺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전주와 비슷한 느낌도 있습니다.



가나자와에는 300년간 마에다 가문이 살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섯 다이묘(영주) 중 하나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누르고 에도 막부시대를 열자 견제를 받아 정치에서 손을 떼고 문화예술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나자와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남게 되었죠.


오미초 시장의 스시집

금박 아이스크림


가나자와에서 유명한 것 중 하나는 금박공예입니다. 가나자와라는 지명 자체가 ‘금이 나는 연못’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실 가나자와에서는 금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습도가 높아서 1g의 금을 0.0001㎜ 두께로 늘리는 금박에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에서 소비되는 금박의 99%를 가나자와에서 생산하고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죠.


금 아이스크림, 금 카스텔라, 금 골프공 등 금박으로 만든 제품을 곳곳에서 팔고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반짝이는 것을 보면 눈이 가게 마련이니까요. 어느새 제 손에는 금박 아이스크림이 들려져 있더라고요.


한적한 길을 따라 시청까지 왔습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21세기 미술관은 시청 바로 옆에 있네요. 한국에서부터 한 달음에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단풍잎이 든 나무가 드문드문 뻗는 넓은 공터를 지나자 드디어 21세기 미술관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21세기 미술관 외부

21세기 미술관 내부


미술관을 보면서 두 번 놀랐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낮은 1층짜리 건물인 것에 놀랐고, 그 다음엔 둥근 원형의 건물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해 안과 밖이 투명한 건물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2만7000제곱미터 넓이에 지름 110미터로 둥글고 낣작한 이 건물로 들어가면 바깥 둘레를 따라 돌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건물 안과 밖에서 사람들이 나란히 걸을 수 있습니다. 건물 밖의 사람은 건물 안의 사람을 볼 수 있고, 건물 안의 사람은 건물 밖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인데요. 단지 수영장 뿐만 아니라 이 미술관의 컨셉트 자체가 이처럼 작품과 방문객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설계였습니다.


21세기 미술관 1층 전시공간

21세기 미술관 놀이방

21세기 미술관 도서관

21세기 미술관


저는 때로는 건물 안으로, 또 때로는 건물 밖으로 걸으면서 미술관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미술관은 건물 바깥에도 흥미로운 작품을 전시해 놓아서 건물 밖을 걷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건물 밖의 전시품 관람은 당연히 무료이고요. 1층의 관람도 무료입니다. 오직 지하층의 전시관만 유료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합니다. 1층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도서관도 있습니다.


건물 밖에 있는 전시품 중 인상적인 것은 셀로판지 같은 창을 달팽이관처럼 여러 개 덧대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 울라프 엘리어슨의 '컬러 액티비티 하우스(Colour Activity House)'라는 작품으로 빛, 그림자, 색, 안개, 바람, 파도 등 자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컬러 액티비티 하우스

컬러 액티비티 하우스

컬러 액티비티 하우스

컬러 액티비티 하우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드디어 수영장이 보입니다. 이 수영장을 보기 위해 저는 먼 길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수영장 안에 사람이 없습니다. 수영장 안에 옷 입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이 없다니요. 수영장 안에 사람이 없으니 사진을 찍어도 그냥 수영장처럼 보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내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거기에는 다음 전시를 위해 지하 전시장을 일시적으로 폐쇄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날벼락이… 결국 저는 수영장 작품을 반쪽만 보고 나와야 했습니다. 어찌나 허무하던지요.


눈물의 '수영장'

수영장 지하 전시장 입구 앞에 걸린 폐쇄 안내문


혹시나 저처럼 21세기 미술관에 수영장 작품을 보러 갈 계획을 세우신 분이 있다면 지하 전시장을 폐쇄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보시고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수영장은 제대로 못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미술관은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해준 멋진 건축물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공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경계가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품과 관람객의 경계가 없고, 안과 밖의 경계가 없고, 정면과 후면의 경계도 없습니다. 어디로 입장해도 거기가 입구이자 출구입니다.


미술관에는 이밖에도 장 파브르의 ‘구름을 재는 남자’, 제임스 터렐의 ‘블루 플래닛 스카이(Blue Planet Sky)’ 등 여러 멋진 작품들이 있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나왔더니 잔디밭에 파이프 모양의 설치물이 보였습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파이프에 매달려 말을 하거나 귀를 대고 들어보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독일 작가 플로리안 클라르(Florian Claar)의 ‘Klangfeld Nr.3 Fur Alina’라는 작품입니다. 한쪽에 대고 말을 하면 바닥을 타고 다른 쪽까지 그 소리가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예술의 역할이라는 게 저 웃음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1세기 미술관 오픈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금·토요일은 오후 8시까지) 월요일 휴관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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