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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을 보고 싶었다. 머리 아픈 일도 많았다. 오해받는 것도 너무 짜증났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침잠하게 되는 기분이 싫었다. 무엇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지리산에 가본 적이 없었다. 지리산은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가벼운 사람인데. 빨치산이니 종주니 하는 심각한 단어는 나랑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리산에는 단풍이 있을 것이었다. 산이 크고 높은 만큼 눈 앞에 거대한 단풍 숲이 펼쳐질 것이었다. 기대를 품고 주말에 지리산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었다. 그중 경남 함양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제일 무난해 보였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 모든 버스와 기차는 이미 매진이었다. 나처럼 주말에 지리산에 가려는 서울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다음 루트를 찾았다. 전남 구례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이다. 구례로 가는 버스는 티켓이 남아 있었다. 희한하게도 고속버스보다 시외버스가 더 빨랐다. 고속버스는 4시간 걸리는데 시외버스는 3시간이면 간다. 아마도 다른 루트로 가나보다. 토요일 아침 남부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탔다.


구례에 도착했다. 내부는 작았지만 외관은 꽤 번듯하게 지어놓은 한옥 구조물로 된 터미널이었다. 나중에 돌아다니다 보니 이 터미널은 어디서도 눈에 띄었다.



노고단 정상에 오르려면 미리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한다. 환경 보호를 위해 노고단 고개부터 정상까지 입산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구례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당일 예약은 불가능해 할 수 없이 일요일로 예약했다. 이 날은 피아골에 가서 가볍게 지리산 맛보기만 했다. 단풍은 아직 진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다음날 아침 화엄사로 갔다. 백제시대에 지어진 화엄사는 넓고 아름다웠다. 화엄사는 ‘화엄경’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곳에는 가장 오래된 ‘화엄석경’이 있다고 한다.


화엄사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단풍은 아직 절정이 아니어서 3분의 1 정도만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러나 나는 스트레스 탓인지 잘못 먹은 음식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화엄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 중인데 거기서 자다 나온 듯한 아이와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동그란 안경을 쓴 모습이 동자승처럼 보였다. 화엄사에는 화장실이 한 곳뿐인데 계곡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압이 매우 약하다. 아이에게 변기가 막혔다고 말해주었더니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아이가 자연 화장실을 찾았기를…


화엄사 입구에는 노고단 고개까지 올라가는 등산로가 표시되어 있다. 노고단 고개까지 7.6km 길이라고 한다. 7.6km면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사실 노고단으로 가는 더 쉬운 길이 있었다. 화엄사를 내려가 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가면 거기서는 2km 정도의 평탄한 길을 따라 노고단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직접 걸어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특히 나 같은 등산 초보에게는 얼마나 고된 길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마 알았다면 이 길로 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르니까 갔다. 얼마나 힘들지 모르니까 그 무지함을 무기로 도전했다.



처음 2시간가량은 쉬운 길이었다. 스님들이 수행하며 걷는 길 바닥엔 거적을 깔아놓아 걷기 편했다. 이후 지리산 국립공원 입구가 나타나고 거기서부터는 진짜 등산이었다.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반달곰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지리산은 반달곰 보호 특별구역으로 56마리의 반달가슴곰이 살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많이 나타나서 뉴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반달곰의 주의 표지판에는 만약 반달곰을 보게 되면 약올리지 말고 무시하고 가라고 적혀 있었다. 곰을 약올릴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반달곰은 키가 사람 키 정도로 작은 편이라 무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곰은 정말 포악하고 재빠른 동물이라는 것을 나는 핀란드 라플란드에서 봐서 알고 있었기에 조금 겁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리가 아파왔다. 등에 땀이 흘렀다. 걷다가 쉬다가 또 걸었다. 발을 디딜 수 있는 돌을 찾고 그 돌을 밟고 또 다른 돌을 찾고 돌을 밟으며 올랐다. 바닥을 보고 걷느라 정작 산을 제대로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지루해지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계곡이 나타나면 물을 마시며 걸었다.



해발 1100미터 지점에서 고비를 맞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도저히 더 이상 올라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초보자에게 이 길은 결코 쉽게 완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주저 앉아 여기서 포기하고 내려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화엄사를 출발한 시간이 오전 11시이니 4시간 30분이 지난 것이다. 사실 오후 2시 정도엔 정상에 올라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지리산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출발할 땐 내려오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는데 이젠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려가는 길도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올라가는 것보다는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려가자, 내려가자... 머리는 다리를 유혹했다. 일단 주위에 큰 바위를 찾아서 드러누웠다. 주머니에 넣어온 귤이 생각나 까먹었다. 달다. 정말 달았다. 귤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시야엔 단풍나무와 푸른 하늘만 들어왔다. 평온하고 고요했다. 땀이 목 뒤로 흘러내리고 땀이 마른 이마에 바람이 솔솔 불어와 시원했다.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이 들든 들지 않든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일어나서 지도를 봤다. 노고단 고개는 해발 1300미터에 있다. 여기서부터 지도상 등고선 기준으로 7칸을 올라가면 된다. 다섯 칸 올라오는데 20분쯤 걸렸으므로 30분만 더 가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힘이 났다.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올라가야 한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돌을 밟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저 멀리 평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 해발 1300미터 지점에 다다랐다. '무넹기'라고 불리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고단 고개까지는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 이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형형색색 등산복을 입고 등산스틱을 든 아저씨 아주머니들, 그리고 가족 단위로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지나가는 나들이객도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나와는 완전히 대비가 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마치 오지탐험을 마치고 온 비문명인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람들을 쳐다봤다. 화엄사에서 내려가 버스를 탔으면 나도 저들처럼 여유롭게 노고단을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이없게 느껴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해냈다는 짜릿한 성취감도 들었다. 30분 전에 포기하고 내려갔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니까 이 감정은 내게 소중한 것이다.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나는 매점에서 캔커피와 초코바, 초코파이를 사서 허겁지겁 먹었다. 초코바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서 더 사먹었는데 나중엔 후회했다. 몸 속에 집어 넣은 지리산의 맑은 기운을 초코바가 다 먹어치워버린 것 같아서였다.



올라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은 아래를 내려다 볼 때 비로소 찾아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산은 아름다웠다. 화엄사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굽이굽이 뱀처럼 펼쳐져 있었다. 단풍은 조금씩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한두 주 후면 지리산 전체가 붉게 물들리라. 저 멀리 섬진강이 보이고 그 뒤로는 무등산까지도 보인다. 나는 한동안 지리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성삼재로 가는 평이한 코스를 택했다. 성삼재까지 1시간을 걸어간 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 금세 구례로 갈 수 있다. 버스에서 붉은 태양이 지리산을 빨갛게 물들이는 광경을 보았다. 빨갛게 빨갛게 온 산이 타오르고 있었다.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붉은 산이 거기 있었다. 마치 오로라가 하늘을 휘감듯, 붉은 노을이 온 산을 태우고 있었다. 단풍을 놓쳤다고 생각했지만 새삼스럽게 붉은 태양을 발견했다. 그 순간 만큼은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토록 경외로운 자연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지리산에 올랐고, 오르면서 기절할 정도로 힘들었고, 정상에선 성취감에 짜릿했고, 내려오면서 붉은 마법 같은 선물을 받았다. 이 순수한 감정들은 모두 그날 지리산이 내게 준 것이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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