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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반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영국군의 입장에선 뒤꽁무늬를 빼는 퇴각이었지만 깔레 해변에서 독일군에게 몰살당하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기에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민간 어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귀환하던 영국군은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독일군 전투기가 언제 배를 쑥대밭으로 만들지 모르고, 또 바다에는 독일 함선이 언제 나타날지 몰랐으니까요. 며칠 동안의 항해 후 병사들은 하얀색 깎아지른 절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이 하얀색 절벽이 바로 세븐 시스터즈입니다.


세븐 시스터즈 절벽. 멀리 7개의 낮은 언덕이 보이나요?


이곳을 세븐 시스터즈라고 부르는 이유는 7개의 언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해안에서 바라보면 낮은 언덕 7개가 보인다는군요. 세븐 시스터즈를 보기 위해 런던브릿지 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기차가 후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심합니다. 분명히 런던에서 브라이턴까지 가는 기차 티켓을 샀는데 기차가 브라이턴까지 가지 않고 쓰리 브리지스에서 멈춥니다. 여기서 내려서 대체 버스로 갈아타야 합니다. 쓰리 브리지스에서 브라이턴 사이에 약간의 산악지대가 있는데 아마도 거기 철로에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고도 없이 기차가 버스로 바뀌었습니다. 황당합니다.


기차표를 샀는데 버스를 타라네요.


영국 사람들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버스를 타네요. 2층 버스 10여대가 기차역 근처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왜 안내도 안 해주냐며 소리지른 사람 있었는데 억양을 보니 동유럽계 외국인인 듯합니다.


어쨌든 다시 버스를 타고 브라이턴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웃기지만 버스가 버스 터미널이 아닌 기차역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기차 티켓을 내고서야 기차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브라이턴


브라이턴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달려 벌링 갭(Birling Gap)에 내립니다. 여기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드디어 세븐 시스터즈 절벽이 보입니다. 걸어가는 길은 햇볕이 너무 따가워 땀이 송글송글 이마와 등에 맺혔지만 그래도 멋진 경치 덕분에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벌링 갭(Birling Gap)

세븐 시스터즈 해수욕장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미역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

세븐 시스터즈를 지키는 등대


세븐 시스터즈 해변에서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늘어지게 잤습니다. 점심은 브라이턴에서 사간 샌드위치와 과일을 해변에서 먹었어요. 맥주도 한 잔 마셨더니 잠이 잘 오더라고요. 잠에 취해 있다가 기분 좋게 일어나서 일곱 언덕 중 한 곳에 올라 사진 찍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브라이턴으로 돌아왔습니다.


버스 안에서 문득 제가 떠나온 곳이 세븐 시스터즈였다는 게 생각났어요. 덩케르크 영국군이 환호성을 지른 곳이자 또 영화 '어톤먼트'와 '로빈 후드'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던 곳인데요. 정말 환상적으로 멋진 절벽이었는데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와! 멋진데! 사진 찍어야지. 그리고 사진 찍고 나서는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어쩌면 사진은 망각을 촉진하는 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편하더라고요. 역사적 장소로 의미를 되새기기보다는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 자체로 좋은 거죠. 그런게 또 여행의 묘미인 것 같아요. 과거엔 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지금 저는 현재를 살고 있잖아요. 저에게는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거죠.


브라이턴 해변

샴페인 카바로 건배

브라이턴은 해산물 천국


브라이턴에서 해변 앞 식당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해산물을 실컷 먹었어요.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한쪽 팔이 거의 타들어갈 지경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홍합에서 살을 계속 끄집어내고 게살도 발라냈습니다. 폭풍흡입하고 나니까 해가 저물어 가네요.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브라이턴 기차역으로 걸으며 오래된 팝송을 들었습니다.


제가 브라이턴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17년 전 혼자 왔을 때는 우중충한 해변도시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뜨거운 햇살 때문에 전혀 다른 기억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굿바이 브라이턴, 페어웰 세븐 시스터즈. 저는 돌아갈 때도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는 이 흔치 않은 경험은 상당히 불합리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 기간 저에게 벌어진 일이죠. 그날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여행의 묘미잖아요. 며칠 후 런던~브라이턴 기차 노선을 살펴보니 다시 직항으로 바뀌었더라고요. 그동안 산속의 철로를 수리했나 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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