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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지하철 해머스미스역(Hammersmith). 배스와 스톤헨지로 가는 일행이 모였습니다. 런던에서 처음 해보는 일일투어인데요. 가이드는 앳된 얼굴의 한국 여성이고 일행은 8명 정도입니다. 엄마와 함께 온 딸, 혼자 온 20대 여성 두 명, 중년 부부, 그리고 저와 제 동료.


혼자 가는 여행도 좋지만 하루쯤 가이드 투어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더라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다른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죠. 물론 무엇보다 이동이 편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버스에 가만히 앉아 밀린 잠을 자거나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알아서 데려다 주니까요. 뭔가 잘 안 되면 가이드 탓만 하면 되니까요. :)


배스에서 본 독특한 꽃나무


집집마다 예쁜 꽃을 키워요.


저 쇠고리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신발의 흙을 터는 것이래요.


버스를 타고 배스로 갑니다. 2시간이 조금 안 걸리는 거리입니다. 런던에서 173km 떨어진 곳이래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영국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줍니다. 그중 제 흥미를 끈 사실 한 가지. 영국의 자동차는 왜 왼쪽 차선으로 달릴까요? 이는 영국이 자동차 발명국이라는 점과 관련 있어요. 자동차 이전 마차 시대부터 운전석을 오른쪽에 두었는데(채찍을 오른손으로 들고 말의 등을 때리기 위해) 이 관습이 자동차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의 자동차들은 왜 오른쪽 차선으로 달릴까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마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자동차 산업을 규제하자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프랑스로 대거 이주했는데요.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프랑스는 영국과 무조건 반대로 하기 위해 운전석을 왼쪽으로 바꿨다고 해요. 이처럼 역사는 참 단순한 질투심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네요.



배스는 화산지대도 아닌데 영국에서 유일하게 천연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도시로 유명합니다. 이름 그대로 로마 시대 거대한 목욕탕이었다가 중세에는 한물간 영세한 도시로 전락했죠. 하지만 1755년 멘딥 구릉에서 로마인들의 온천장이 발견되면서 상류층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이 물이 병을 낫게 해준다는 소문이 돌며 왕과 귀족들의 휴양지로 각광받았습니다. 지금은 인구 10만명 정도가 사는 아주 작은 도시지만 여전히 은퇴한 부유층이 많이 산다고 해요.


배스하면 목욕을 연상시키는데 이 단어가 목욕을 뜻하게 된 것은 바로 목욕을 대표하는 장소인 이곳에서 이 단어가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배스라는 도시가 곧 목욕을 뜻하는 'bath'의 어원인 셈이죠. 기원전 860년 당시 겔트의 왕 블라더드는 나병환자였는데 요양차 이곳 배스에 들렀다가 연못에 빠진 뒤 나병이 나았다고 해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치료하러 이곳을 찾으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로마가 브리튼을 정복한 뒤 정식으로 온천장이 지어졌습니다.


배스의 버스커


배스 수도원 앞의 퍼포먼스


배스는 로마 시대의 배스와 18세기 조지왕 시대 재발견된 뒤 귀족들이 살기 시작한 배스로 나뉩니다. 유적지도 각각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도시를 걸을 때마다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1987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물러간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배스가 시끄러워진 것은 18세기 조지 3세 시대부터입니다. 제임스 2세의 딸 앤 공주가 배스에서 병을 치료한 사실이 귀족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18세기 중반부터 귀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이들은 아예 막대한 자본을 들여 대저택을 지었고 곧 배스는 사교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로열 크레센트


더 서커스


도시건축가 존 우드 형제, 건축자재인 돌을 후원한 랠프 앨런, 사교계의 리더 리처드 보 내시 등이 지금의 배스를 만든 인물입니다. 배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1775년에 존 우드가 완공한 긴 달 모양의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 그리고 1797년 존 파머가 세운 랜스다운 크레센트(Lansdown Crescent) 등입니다.


제인 오스틴 센터


잉글랜드 상류사회 중심지로써 배스는 문학작품에도 등장해요. 배스에서 작품을 쓴 가장 유명한 소설가는 제인 오스틴이죠. 배스에는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저택이 '제인 오스틴 센터'라는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어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 [노생거 수도원(Northanger Abbey)], [설득(Persuasion)]은 19세기초 배스의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또 토비어스 스몰릿의 소설, 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든의 희곡도 배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조지왕 시대의 배스를 관람하다가 로마 시대의 목욕시설을 보존해 놓은 로만 배스(The Roman Baths)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입장객을 시간대별로 제한하고 있어서 입구에서 조금 기다려야 했습니다. 입구를 지키는 할아버지 안내원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기다리는 저를 웃겨주었어요(사실 하나도 안 웃겼는데 그냥 웃어줬습니다ㅎㅎ).


로만 배스


로만 배스(The Roman Baths)


로만 배스에서 바라본 배스 수도원


로만 배스 박물관에 전시된 로마 시대 동전들


미네르바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대요.


내부로 들어갔더니 정말 거대한 공동 목욕탕이 있어요. 초록색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네요. 손으로 만져보니 따뜻하다기보다 살짝 뜨겁습니다. 물의 온도가 49도 정도 된다고 해요. 물에 손을 담그는 모습을 사진 찍으려고 앉으려다가 그만 손에서 카메라를 놓치고 말았어요.


카메라가 딱딱한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충격을 완화해주기 위해 발을 댔는데요. 그게 큰 실수였어요. 카메라가 제 신발에 맞고는 튕겨져 물 속으로 들어가버렸거든요. 저는 황급히 카메라를 물 속에서 꺼냈지만 카메라는 이미 로마 시대의 초록빛 목욕물을 흠뻑 머금은 뒤였어요. 지켜보던 관광객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는데 저는 눈 앞이 캄캄해졌어요.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산 미러리스 카메라였거든요.--;


로만 배스의 따뜻한 물


안내원이 다가와 카메라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미안하다며 가버립니다. 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네요. 제 잘못인 걸 어떡하나요.ㅠㅠ 로만 배스와 초록빛 물은 잘못이 없죠. 만약 잘못이 있다면 하필 거기 딱딱한 돌로 바닥을 만들어놓은 것이 잘못이겠죠. 돌만 아니었어도 저는 신발을 가져다 대지 않았을 테니까요. 기원전 브리튼을 정복한 로마인들이여, 대체 왜 목욕탕 바닥을 돌로 만드셨나이까. 에휴...


저는 얼른 카메라에서 렌즈와 배터리를 분리하고 휴지로 카메라 본체를 닦아 물기를 없앤 뒤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날이 41일간의 일정 중 셋째 날이었는데요. 이후 여행기간 내내 그 카메라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어요. 다음날 런던으로 돌아와 케닝턴 근처의 캐논 서비스센터를 찾아갔습니다만 완전 침수된 카메라는 고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고칠 수 있을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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