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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쓴 존 르 까레. 그의 대표적인 스파이 3부작 중 한 편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전격 영화화됐다. 그것도 냉전이 끝난지 한참 지나버린 2011년.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는 시기에 <렛 미 인>의 감수성 충만한 스웨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재능을 빌려서 탄생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묵직하고 섬세하다. 2:35:1의 와이드스크린에 등장하는 옛 헝가리나 영국의 거리들과 바바리 코트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옛날 고전적인 스파이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원작 소설에서의 첫 작전지는 체코였지만 영화에서는 헝가리로 변경됐다.)


원작 소설의 발간은 1974년이었고 영국에서는 1979년에 알렉 기네스 주연의 7부작 TV시리즈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이미 유명한 스토리이기에 감독은 마치 관객들이 원작을 다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시작하는 듯 인물들에 대한 소개에 있어 불친절하다. 그래서 헐리우드 스파이물에 길들여진 스피드에 열광하는 현대 관객들에게 초반부는 무척 몰입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등장하는 이름과 얼굴이 매치되면 될수록 긴장감은 살아난다. 스파이 영화 특유의, 쫓고 쫓기고, 누가 누구를 쏠지, 누가 배신자인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위기. 영화를 압도하는 클래시컬한 분위기는 마치 1970년대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향수에 젖게 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헝가리에서의 작전 실패와 그 후유증이고, 또 하나는 내부 스파이 색출이다. (존 르 까레 소설의 단골 주인공인) 조지 스마일리가 헝가리 사건으로 실각했다가 내부 스파이를 몰아낸 뒤 국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큰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터키 사건도중 소련 장교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두더지(이중첩자) 정보를 알게 된 리키, 조지의 명으로 서커스 내부에서 자료를 탈취하는 피터, 연인 관계에서 배신자가 되어버린 빌과 짐, 그리고 인도의 한 공항에서 건네받은 라이터를 통해 사건들을 연결시켜주는 조지 스마일리의 소련 라이벌 칼라 등 여러 사건들이 엮인다.


영화는 대체로 동작이 큰 액션보다는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서 인물들이 어떤 관계이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하게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머리를 써야하는 이런 과정들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중간마다 등장하는 자극적인 사건들에 마음을 뺏기다가 끝나버린 영화에 허탈해질 지도 모른다.


원작 소설은 실제로 영국 정보부 내의 소련 이중간첩이었던 킴 필비를 모델로 쓰여졌는데 이 스토리는 이후 많은 이중간첩 소설과 영화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거의 다 정말 훌륭하다. 게리 올드만은 조지 스마일리 연기로 생애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레옹> <드라큐라> <불멸의 연인> 같은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후보에 올랐다니 아카데미가 편애하는 배우는 따로 있나보다. 빌 역의 콜린 퍼스는 의외로 비중이 크지 않고, 그 대신 짐 역을 맡은 마크 스트롱과 리키 역의 톰 하디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톰 하디는 <인셉션>에서 임스역을 맡았던 매력 넘치는 배우이고, 마크 스트롱은 피터 역의 베네딕트 컴퍼배치와 함께 영국 TV시리즈 <셜록>에 출연했던 배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컨트롤러 역의 존 허트. 개인적으로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의 코끼리 인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베테랑 배우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도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팅커, 테일러, 솔저는 원래 영미권에서 숫자를 세는 놀이다. 하나, 둘, 셋 세는 대신에 재미삼아 팅커, 테일러, 솔저, 세일러, 리치맨, 푸어맨, 베거맨, 티프... 이런 순서대로 세는데 영화에서는 서커스(MI-6)의 수장인 컨트롤러가 발음이 비슷한 세일러를 제외하고 푸어맨과 베거맨을 합해 다섯 개의 암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시종일관 분위기로 압도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근사한 장면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라는 샹송이 흘러나오면서 모든 사건이 함축적으로 정리되는 마지막 장면이다. 콜린 퍼스와 짐 스트롱의 애절한 눈빛교환에 뒤이은 사살, 그리고 새롭게 서커스로 출근하는 스마일리와 피터까지. 헐리우드 스파이 영화의 긴박감과는 전혀 다른 우아하고 고풍스럽기까지한 엔딩이다. 이 마지막 시퀀스를 보기 위해서라도 불친절한 이 영화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About CIRCUS (스파이 용어 사전)


경쟁사 Competition - 정보부(MI-6)의 입장에서 방첩부(MI-5)를 가리키는 말

고객 Customer - 정보이용자

고릴라 Gorilla - 보안요원

너서리 Nursery - 훈련소

두더지 Mole - 이중간첩

램프라이터 Lamplighter - 정보 탐문 요원

레그맨 Legman - 연락책

레지던시 Residency - 해외 지부

론드리 Laundry - 심문소

머더 Mother - 정보부의 고참 여직원

베이비시터 Babysitter - 경계 요원

부드러운 Soft - 비공식적인

서커스 Circus - 영국정보부

스캘프헌터 Scalphunter - 정보부의 암살 및 회유 전담 요원

신부 Bride - 정보부 여직원

주주맨 Jujuman - 마법사. 지역 책임자

커튼 Curtain - 방첩부(MI-5) 

테임 닥터 Tame doctor - 세뇌 요원

프롤(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 현장 요원

허니트랩 Honey-trap - 미인계

*원작소설 해설집 중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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