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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아카데미 영화상의 주인공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었습니다.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영화 경력 25년 만에 처음으로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멕시코 감독으로는 최초로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동시에 가져갔습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쓰리 빌보드> 역시 화제였습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모든 부문 후보에 오른 여성들을 모두 일어서게 하는 인상적인 수상 소감으로 ‘미투’ 운동과 연대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샘 록웰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영화는 2개의 트로피를 챙겼습니다.
마고 로비가 제작, 주연한 <아이, 토냐>는 앨리슨 제니에게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겼습니다. 제니는 “저 혼자 다 한 거예요”라는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남겼는데 과연 영화에서 그녀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로비 역시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주요 부문에서 수상한 위 세 편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영화라는 것입니다. 올해 아카데미는 ‘미투’ ‘타임스업’ 운동에 발맞춰 여성 영화들에 지지를 표했습니다. 한 편씩 살펴볼까요?
#1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1962년 미국 항공우주국 비밀기지에서 일하는 청소부 엘리사(샐리 호킨스)는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인입니다. 그녀의 일상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옆집에 사는 늙은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녀는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욕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냅니다. 언젠가 운명의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어느날 아마존강 유역에서 포획된 반인반어류의 괴생명체가 비밀기지에 들어옵니다. 냉전시대 과학자들은 이 독특한 생명체를 어떻게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괴생명체는 전기고문을 받는 등 실험 대상이 되어 괴로워합니다.
엘리사는 괴생명체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이 거대한 실험실에서 그녀와 괴생명체는 말을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몰래 괴생명체에게 접근합니다. 삶은 달걀을 주고, 음악을 들려줍니다. 삶은 달걀의 껍질이 벗겨지며 속살이 드러나듯, 처음에 낯설어 하던 괴생명체는 차츰 그녀에게 마음을 엽니다.
비밀기지의 관리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괴생명체를 해부하기 위해 죽이려 하자 엘리사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를 구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젠킨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젠킨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뭐라고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해요? 그건 인간도 아니잖아요.”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대사입니다. 말 못하는 여성과 독특한 생명체의 러브 스토리는 이 대사로 인해 설득력을 얻습니다. 엘리사는 괴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또 과감하게 탈출시킵니다. 홀로 시간을 보내던 욕실은 더 이상 외로움의 공간이 아닌, 둘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영화는 초록색과 붉은색 이미지를 대비시켜 시종일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여기에 괴생명체가 내뿜는 푸른 빛은 색감 만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엘리사가 좋아하는 재즈풍 노래와 알렉산더 데스플라의 동화 같은 테마음악은 영상과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룹니다. 이 영화가 미술상과 음악상을 수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과 과감하게 사랑에 빠지고, 또 사랑을 지키고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괴생명체 탈출작전에 나서는 엘리사는 최근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들 중 가장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임에 틀림 없습니다.
#2 쓰리 빌보드
‘내 딸이 죽어가면서 강간당했어.’
‘그런데 아직 범인 못 잡았지.’
‘뭐하고 있나, 월러비 서장?’
인적 드문 고속도로 위 버려진 세 개의 간판에 어느날 내걸린 광고 문구입니다. 강렬한 빨간색 배경에 검정색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광고를 낸 사람은 중년 여성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로 그녀는 몇 달 전 딸을 잃은 뒤 경찰 수사에 진척이 없자 무능한 경찰을 탓하며 사비를 털어 광고를 냈습니다.
광고가 경찰서장을 직접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립니다. 월러비 서장(우디 해럴슨)은 밀드레드를 찾아가 광고를 내려달라고 읍소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월러비는 애원 반, 협박 반의 자세를 취하다가 급기야 자신이 췌장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습니다. 이에 대한 밀드레드의 대답은 “알고 있어. 그래서?”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꼭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유족이 무능한 경찰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선과 악의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피해자가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갑자기 피해자가 되는 삶의 아이러니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를 예측하기 힘듭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스토리의 힘 덕분입니다.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피해자이지만 마을 전체에는 민폐를 끼치는 가해자가 되어버립니다. 월러비 서장은 무능한 가해자처럼 등장하지만 마을에서 꽤 존경받는 인사입니다. 인종차별을 일삼던 또라이 경관 딕슨(샘 록웰)은 어느 순간 진정한 경찰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누구도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다들 어느 정도의 허물은 갖고 있지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허물 만큼 스스로의 허물도 볼 수 있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밀드레드는 자비없는 표정으로 내 딸을 죽인 범인 잡아오라며 경찰서에 불까지 지릅니다. 마을 주민들과 갈등이 심해지자 밀드레드의 아들은 광고판이 있는 길로 가기가 겁난다고 엄마에게 털어놓습니다. 세 개의 광고판이 연쇄적인 사건을 일으켰고, 결국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또다른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밀드레드는 영화 역사상 아마도 가장 뻔뻔하고 담력 큰 여성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가 경찰서에 등장하면 다들 긴장하거든요. 감독과 맥도먼드는 밀드레드가 서부영화의 존 웨인처럼 보이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과연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는 이 민폐 캐릭터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끝까지 지켜보게 만듭니다.
#3 아이, 토냐
토냐 하딩(마고 로비)은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피겨 스케이터입니다. 세 살 때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한 이래 괴물 같은 엄마 라보나(앨리슨 제니)의 혹독한 지도 아래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또래들은 친구가 아닌 경쟁자였고, 이겨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강압적인 환경에서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고 자라서인지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합니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언니들을 제치고 우승을 독차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실력에 걸맞는 인성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엄마한테 맞으면서 컸기 때문인지 그녀는 가장 여성스러운 스포츠를 하면서도 터프함과 욕설이 입에 뱄습니다. 토냐는 경기 시작 전 피우던 담배를 스케이트날로 비벼 끄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여성스러웠던 적이 없어요."
토냐는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제프(세바스찬 스탠)와 사랑에 빠져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남편 툭하면 토냐를 때립니다. 폭력이 익숙한 토냐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제프에겐 션(폴 월터 하우저)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허풍쟁이에 겁쟁이입니다. 덩치가 산만해서 그는 토냐의 보디가드로 채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토냐는 올림픽 출전권 경쟁을 앞두고 평소 낸시 케리건(케이틀린 카버)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는데 션이 그 말을 듣고는 그만 청부폭행을 감행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션과 제프만의 범행인지 아니면 토냐까지 개입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영화도 여기에는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은반 위의 악녀’로 오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됩니다. 토냐를 비롯한 네 명의 개성이 워낙 강해 이들이 내뱉는 말들과 어이없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이 극대화됩니다. 인물들은 마치 가짜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을 향해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황을 설명해주는데요. 이 기막힌 일들이 모두 실화임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오해받은 피겨 천재인지 혹은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악녀인지, 진실은 오직 그녀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를 사상 유례없는 피겨 스케이팅 폭력 스캔들로 몰고 간 배경에는 고질적인 가정폭력이 있었습니다. 제목인 ‘아이, 토냐’는 영화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연이자 제작까지 맡은 마고 로비는 경기장에선 놀라운 피겨 스케이팅 솜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일상에선 ‘할리퀸’을 떠올리게 하는 터프함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SK하이닉스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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