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영화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비극의 역사가 돈이 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세계대전의 아픔을 그린 수많은 영화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통해 배급된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의 고난, 한국전쟁의 비극, 5.18 민주화운동 등이 해마다 블록버스터 영화로 소개된다.


이를 아이러니라고 한 까닭은 이것이 나쁘다고 보기에도, 좋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가 역사적 비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안도감이 우리를 극장으로 이끈다. 비극을 거대 스케일의 영상 콘텐츠로 소비하면서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만 미안해하면 된다. 만약 대중문화가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적 비극을 망각으로부터 소환할 효율적 수단을 갖지 못할 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가 아물어갈수록 영화는 다양해진다. 홀로코스트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장르화되었고, 사건 자체가 부각되기보다는 드라마 뒤에서 배경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디아나 존스> 같은 어드벤처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엑스맨> <원더우먼> 등 슈퍼히어로 서사에서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등 21세기 영화들은 홀로코스트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당시 감동적인 실화 하나를 발굴해 극화한 경우가 많았다. 홀로코스트를 보여주는 경우에도 <사울의 아들>처럼 아예 무자비한 시각적 충격으로 정면돌파했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논란은 스너프필름처럼 너무 적나라하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1985년의 9시간 26분짜리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가 홀로코스트 재현 장면을 하나도 집어넣지 않음으로써 희생자들에게 예우를 갖춘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제 두 편의 한국영화를 살펴보자. 두 편 모두 대기업 자본이 들어간 가장 상업적인 영화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한국사의 한 부분을 소재로 택한 극영화다. 천만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역사를 재현했는데 그 시선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먼저,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해인 1945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군함도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19세기 말 미쓰비시 중공업이 이 섬에서 석탄을 채굴하기 시작했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43년부터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징용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제 군함도의 모습과 당시 섬 안에서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고증하면서도 전반적인 스토리는 허구의 인물들과 사건으로 구성했다. 영화는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음모와 배신이 곁들여진 첩보 드라마로 변신한다. 하지만 당시 군함도에는 윤학철(이경영) 같은 거물급 독립운동가 혹은 친일파는 없었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침투한 OSS요원 박무영(송중기)은 더더욱 없었다. 대규모 탈출 계획 역시 허구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일본의 패전 이후 쓸쓸히 작은 배를 타고 섬을 떠나 일본과 조선으로 흩어졌을 뿐이다.


영화가 일부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비판에 직면한 이유는, 이처럼 영화 초반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능욕당하는 참상을 재현하는데 공을 들였으면서도 이후 그 흐름을 깨는 허구적 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과 결이 다른 허구를 뒤섞어 놓아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이다. 차라리 조선인들이 당한 가혹행위를 정공법으로 하나씩 밀도 있게 재현한 뒤,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대탈출을 감행하는 반격과 복수의 서사에만 중점을 두었다면 이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류승완 감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는 260억짜리 대작 영화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플롯으로 우직하게 밀고 간 끝에 "너무 평면적"이라고 비판받을 영화보다는, 그동안 재치있는 영화를 만들어온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군함도>를 한국사회의 축소판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이 영화에는 외부의 위협에도 서로 반목하는 한국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합해 외세에 맞서 싸우는 모습 등 이 땅의 백성들이 슬기롭게 헤쳐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군이 나빴다는 건 누구나 안다. <군함도>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류 감독의 항변에서도 이런 의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류 감독은 군함도를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줄 밀폐된 장소로 생각한 듯하다. 영화 속 주요 갈등은 조선과 일본의 대결 이전에 인간 본성의 이중성 그 자체에서 온다. 강력한 권력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또다시 지배와 피지배로 권력관계를 나눠 상위 지배자의 부당한 권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속성이 있는데(현대 사회의 수많은 '갑질'과 '을질'들을 보라) 이는 <엑스페리먼트> 등 여러 영화의 주제였다. 영화는 윤학철 캐릭터를 통해 이러한 인간의 속성 역시 집중 부각시킨다. 영화 중반까지 갑의 지배 하에 놓인 을과 병이 대결하다가 후반부에 들어서 을과 병이 힘을 합쳐 갑에 대항하는 서사는 마치 <브이 포 벤데타>처럼 응집력을 만들어내줄 것으로 감독은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군함도>는 감독의 의도대로 봐주기에는 서사 구성이 헐거운 영화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기에도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모든 것을 담을 필요가 없었던 영화다. 왜냐하면 아직 한국인들이 군함도의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비극의 실상을 더 알고 싶어 극장을 찾았는데 엉뚱하게 <쇼생크 탈출> <영광의 탈출> 비슷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과욕이랄까. 감독이 자신의 의도대로 이 영화를 제대로 장르영화로 소화하고 싶었다면, 영화 초반부터 이것이 명백히 허구의 창작물임을 스토리로 인지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같은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말이다. 단지 자막으로 이것이 허구라고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1980년 5월의 서울과 광주를 재현한 <택시운전사>를 살펴보자. 영화는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외부인의 시점으로 5.18을 보여주는데 거의 로드무비 혹은 버디무비에 가깝다. 관객은 영문을 모르는 서울 택시기사의 시점 혹은 카메라를 든 외신기자의 시점으로 역사적 그날 광주 시내 한복판에 서게 되고, 그 속에서 광주 시민의 아픔을 현재진행형으로 간접 체험한다.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8년> 등 이전의 5.18 영화들이 대부분 피해자의 아픔을 이야기했다면, <택시운전사>는 제3자의 시점에서 광주를 스펙터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광주는 비극의 현장이기 이전에 엄청나게 비밀스런 볼거리다. <덩케르크>가 제2차 세계대전 속 덩케르크 해안을 현존감을 강화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현했다면, <택시운전사>는 광주 밖에서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거의 드문 '그때 그곳'을 마치 가상현실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듯 목격하도록 유도한다.



서울과 외국에서 온 두 이방인은 광주에 잠입해 대학생, 택시기사 등 평범한 시민들을 만나지만, 현지인들의 역할은 몹시 제한적이다. 단지 신파적 효과를 노리고 등장했다가 퇴장할 뿐이다. 영화의 주요 플롯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두 이방인의 우정에 맞춰져 있는데 돈 때문에 의심하고 다투던 두 사람이 교감하게 되는 계기는, 빠져나와보니 아무도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함께 있었다는 경험'이다. 즉, <택시운전사>는 '희귀한 경험'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 속에 시위 현장이 꽤 적나라하게 오랫동안 재현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함도>는 역사의 비극을 장르영화의 틀 속에 녹였고, <택시운전사>는 역사의 비극을 스펙터클로 만들었다. 모두 기존 한국영화들의 전개 방식과는 다른 시도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따져볼 수는 있겠으나 어차피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 리얼리티를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전적으로 관객의 감수성과 관용 범위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로부터 72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37년가량의 시간이 흘렀으니 그 시간의 더깨만큼 관객마다 소재를 받아들이는 상흔의 깊이도 다를 것이다.


<군함도> <택시운전사> 이후에도 영화는 계속해서 비극의 역사를 상업적 목적을 위한 배경으로 삼을 것이다. 장르적 재미 가득한 롤러코스터 플롯과 대규모 스펙터클을 '의미있는 목적'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어쩌면 나중엔 3D 안경을 쓰고 아이맥스 스크린에서 군함도와 광주의 비극적 순간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비극의 역사를 회고할 다른 효율적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인류가 예술 활동을 시작한 원초적 목적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신이 죽인 동물의 그림을 벽에 그림으로써 죄를 용서받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림 그리고 감상하는 행위에서 유희적 기능을 발견하게 됐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비극적 역사를 처음으로 스크린에 옮긴 사람들은 무척 진지했다. 첫 5.18 영화 <오! 꿈의 나라>(1989), 첫 위안부 영화 <낮은 목소리>(1995)의 진지함을 떠올려 보라.


하지만 시간과 반복은 모든 것을 무뎌지게 만든다. 1.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그 변화의 출발선에 있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향후 상업영화가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방식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 입소문의 힘 <군함도>의 몰락과 <택시운전사>의 반사이익

>> 37년전 광주로 간 <택시운전사> 지나친 안전운전

>> 천만영화 노리는 <군함도> 잃은 것과 얻은 것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