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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양분이 된다. 처음 홍상수 감독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일상을 영화의 프레임 안에 담는 데 능숙한 감독이니만큼 우디 앨런처럼 자기 이야기를 분명히 영화로 만들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처럼 연속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 후>는 명백히 감독 자신의 스캔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부인하지만 자신의 스캔들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택했다. 영화에는 스캔들 이후를 연상시키는 상황들이 등장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여자의 고통을 그린 이야기이고, <그 후>는 불륜에 빠져 아내와 갈등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 후>


욕하는 대중이 대부분이겠지만 혹자는 이해하면서 영화를 볼 것이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직접 대중의 관심사가 되고, 그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 대중에게 선보여 다시 관심을 끈다. 이쯤되면 그 자신이 ‘불륜의 아이콘’이 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욕할수록 그는 더 많은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보답할 것이다.


스캔들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는 각자 판단에 맡기고, 스캔들이 홍상수의 영화에 미친 영향만 살펴보자.



홍상수 영화는 스캔들 이후 분명히 달라졌다. 과거 홍상수 영화가 젠 체하는 남자들의 쩨쩨한 위선을 비웃고 풍자했다면, 스캔들 이후 홍상수 영화는 인물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간다. 인물의 안위를 걱정하고(밤의 해변에서 혼자), 지질하게 굴지 않고 오히려 쿨하게 잊어버린다(그 후). 관음증적인 남성의 시선을 버리고,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를 한다.


과거 홍상수 영화에서 교수, 감독, 시인 등의 직업을 가진 남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자들은 ‘진짜 저를 아세요?’라고 말하며 애를 태웠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자기만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이 하나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후>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 후>는 이런 표피적인 인간 관계를 벗어나려 한다. 홍상수는 예전처럼 제3자 입장에서 위선적인 남자들을 놀려대며 비웃지 않는다. 섹스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건의 진실이 아닌 그 사건으로 인한 파장을 소재로 삼는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인물들(특히 여성)이 받는 고통이 더 중요하다.


주인공은 절박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김민희)는 남들이 몰라준다며 괴로워하다가 불륜남인 영화감독과 대면한 자리에서 기어이 진심을 털어놓는다. <그 후>의 봉완은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아름과 창숙 사이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사면초가에 처하자 목놓아 울어버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두 영화 모두 기존 홍상수 영화처럼 같은 사건을 세 번씩 반복해서 재구성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홍상수식 남녀는 여전히 우스꽝스럽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그 시간의 흐름이 누군가에게는 시련이고 누군가에게는 망각일지언정 되돌아가지 않고 놓아둔다. 진실 탐구를 포기한 대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상 받으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싶었어요."


<그 후>의 후반부에서 아름(김민희)은 봉완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앞부분에서 그 수모를 당하고도 한참 후 다시 그를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봉완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진정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홍상수라면 이를 인물별로 세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과거과 현재를 적극적으로 교차시키며 오직 한 가지 버전으로만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압축한 대신, 진실을 구분해주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은 진짜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를 나눠준다. 과거 홍상수 영화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구성이다. 아마도 홍상수 감독 본인이 시간의 의미를 더욱 더 믿기 시작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 후>


<그 후>에서 봉완과 아름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믿음과 실재에 관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봉완은 진실이 어딘가에 실재한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아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보다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홍상수 영화의 변화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이 봉완의 말처럼 ‘실재라는 느낌’을 추적하는 과정이었다면, 최근 영화들은 아름의 말처럼 믿음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은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밤 택시 안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리 없을 텐데도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는 잠에서 깨어나 모래사장을 뚜벅뚜벅 걷는다. 지금까지 있던 일들이 사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영희가 걷는다는 의지만 강조된다. <그 후>도 비슷하다. 하룻밤 소동이 끝난 뒤 영화는 후반부에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후일담을 삽입한다. 시간이 지난 후 옛 기억은 흐릿하고 모든 것이 정리돼 있다. 봉완은 “딸 때문에 내 인생은 포기했어"라고 말하며 아내와 살고 있는 스스로를 자조한다. 아름은 사무실을 나와 눈 쌓인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두 영화의 몽환적인 엔딩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진실이라는 실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갖고 있는 믿음만이 소중하다고 말이다.


<그 후>


캐릭터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서 여성은 대개 객체였다. <옥희의 영화>는 옥희를 주변 남자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다룬 이야기였고, <해변의 여인>은 고현정의 영화지만 한편으론 김태우가 고현정을 바라보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는 김민희가 처음 나온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까지도 계속된다. 그 영화에서 역시 정재영은 김민희를 꼬시기 위해 여러 상상을 한다. 이 범주를 벗어나는 여성은 분량이 짧은 주인공의 친구나 지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스캔들 이후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김민희)은 더 이상 성적 객체가 아니다. 남자들은 더 이상 김민희를 꼬시려 하지 않는다. 남녀 관계는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지만 김민희는 그 속에서 빛난다. “왜 사시나요?”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은 똥폼잡는 남자들이 아니라 여성(김민희)이다.


그렇다고해서 홍상수 영화의 다른 여성 캐릭터들까지 모두 변한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그 후>에 등장하는 봉완의 아내 해주(권해효의 실제 아내인 조윤희가 연기했다)는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튀어나온 여자처럼 보인다. 아무리 잘 봐줘도 막장 아침 드라마 수준이다. 그는 김민희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이고 끝까지 사과도 하지 않는다. <자유부인>을 대하는 불륜남의 표독한 아내 같은 모습이랄까. 또, 봉완의 불륜녀인 창숙은 겉과 속이 다르다. 여성을 질투하는 여성의 전형이다.


<그 후>


홍상수의 여성관은 여전히 이토록 단순하다. 남자를 괴롭히거나(해주), 남자를 경배하거나(창숙), 혹은 남자에게 영감을 주거나(아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희라는 주체적인 캐릭터는 홍상수 영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 후>처럼 성적 긴장감 없이도 홍상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스캔들 이후 홍상수 영화는 분명히 달라졌다. 캐릭터가 생생하고, 대사도 더 긴장감 넘치며, 무엇보다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든다. 일상 속관계에서 삶의 부조리함을 캐치하는 방식이나 줌의 사용 등 형식적 스타일은 그대로지만 등장 인물을 더 이상 시간이라는 미로에 가두지 않고 삶의 의지로 빠져나오게 한다. 한동안 비슷하게 반복되는 홍상수 영화들을 보는 것은 피로한 일이었으나 최근 영화들은 끝까지 예측하기 힘든 전개로 인해 만족스럽게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


사랑의 힘은 예술가의 오감을 깨어나게 할 만큼 대단한가 보다. 특히 금지된 사랑이어서 더 간절한 마음이 창작력으로 승화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디 앨런도 스캔들이 불거진 1990년대 초반에 걸작을 연달아 내놓지 않았던가. 비록 불륜은 사회 통념상 용납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뛰어난 홍상수 영화를 계속 보게 되길 바란다면 지나친 희망일까.


>> '그 후' 발자국 위에 눈 내리듯 사라진 그날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위선을 버린 홍상수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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