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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후반부 스토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너네들이 더러운 짓 한 것 모를 줄 알아?”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의 아내 해주(조윤희)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한다. 그는 회사로 찾아와 직원 아름(김민희)의 뺨을 때린다. 오늘 첫 출근한 아름은 영문을 모른다. 이후 삼자대면한 상황에서 봉완은 아름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해주는 믿지 않고 끝까지 아름에게 사과를 거부한다.


해주가 돌아간 뒤 봉완과 아름은 술을 마신다. 아름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봉완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 내일도 출근하라고 달랜다. 그때 연락두절됐던 봉완의 그녀 창숙(김새벽)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함께 일하기로 약속한다. 창숙이 일을 재개하면 아름은 해고돼야 하는 상황. 화가 난 아름은 소리친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면서요?”



영화 <그 후>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좌충우돌 코미디와 그 후일담으로 구성돼 있다. 가장 밝고 경쾌한 홍상수 영화 중 하나다. 봉완은 변명이 일상인 비겁한 남자, 해주는 의심 많은 막무가내형, 창숙은 로맨스를 바라지만 계산적인 여자, 아름은 사건의 한복판에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관찰자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건의 퍼즐을 흩뜨러뜨린다. 창숙과 아름은 과거였다가 현재가 되기를 반복한다. 장난스런 시제의 퍼즐 맞추기, 세 여자 사이의 오해와 잔꾀, 소주 한 잔 마시고 주고받는 인생에 관한 대화가 흑백화면에 유머러스한 단편소설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개인적인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사회적 지탄에 괴로워하는 김민희를 위로하는 영화였다면, <그 후>는 아내와 갈등을 겪는 본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부인하지만 자신의 스캔들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택한 듯하다.


우디 앨런, 프랑수아 트뤼포 등 예술가들 중엔 자신의 사생활에 쏟아진 관심을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는 진심을 담아야 하고 그러려면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화해야 한다는 창작자를 위한 격언을 영리하게 이용한 사례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말은 적어도 영화를 만드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후>에서 눈여겨 볼 장면은 마지막 후일담이다. 봉완은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해 찾아온 아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날 때 나눴던 대화를 반복한다. 가족은 뭘 하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같은 뻔한 내용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런 대화는 사실 대화가 아니다. 대화가 반복되면서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지금은 과거인가 혹은 미래인가. 그전까지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아름과 창숙을 대비해왔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아름은 마치 대과거처럼도 보이고 미래처럼도 보인다.


혼란이 질서로 자리잡는 순간은 봉완이 아름을 알아볼 때다. “우리 이런 대화 나눈 적 있죠?” 그제서야 아름도 봉완이 자기를 알아본다는 것을 알아채고 웃는다. 만약 이 대사가 없었다면 관객은 끝까지 혼란 속에서 헤매야 했을 것이다.


그날 그들이 한 일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뻔한 대화 속에서 우연히 어렴풋이 그날의 상황이 튀어나오고서야 소환되는 평범한 과거일 뿐이다. 그날 봉완과 창숙은 거기서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했으나, 그 후 아름과의 회상 속에서 창숙에 대한 봉완의 기억은 흐릿하다. 봉완은 “딸 때문에 내 인생은 포기했어"라고 말하며 아내와 살고 있는 스스로를 자조한다.



발자국 위에 눈이 쌓이듯 그날(들)의 소동과 난리법석은 ‘그 후’가 되어 사라진다. 아름은 사무실을 나와 눈 쌓인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어쩌면 아름이 봉완의 사무실을 다시 찾은 이유는 단지 봉완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을 회고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재가 된 ‘그 후’만이 눈 내리는 길 위에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날’엔 잘잘못이 뚜렷해 보였지만 ‘그 후’엔 누구의 잘못인지는 의미가 없고 오직 나 자신만이 중요하다. 인생이 원래 그렇지 않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랑은 가까이서 보면 절박한 희극이고, 훗날 멀리서 보면 희미한 비극이다. 영화의 엔딩이 아름의 뒷모습이 아니라 중국집 배달원이 자장면을 들고 봉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인 것은 결국 지금의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후 ★★★★

사랑은 가까이서 보면 절박한 희극, 훗날 멀리서 보면 희미한 비극.


>> 스캔들 이후 달라진 홍상수 영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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