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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영화를 바꿀 수 있다. 지난 정권에서 우리는 지겹도록 이를 목도했다. 블랙리스트에, 영화제 지원 중단 압박에, 코드 맞춘 영화만 지원 등 정치권력이 영화를 갖고 놀았다는 증거는 많다. 그렇다면 영화도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변호인>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배우 중 한 명인 송강호는 작년 ‘올해의 영화상’ 수상 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영화 한 편이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명의 관객이 몇 시간 동안 보는 것에 그치더라도, 그것이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영화는 투쟁하듯 정치권력의 남용을 고발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두개의 문> <다이빙벨> <자백> 같은 독립영화 뿐만 아니라 상업영화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풍자했다. <부당거래> <감기> <소수의견> <내부자들> <터널> <판도라> <더 킹> 같은 영화는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더 많은 관객이 찾을수록 영화 속 권력자의 악행은 더 무자비해졌다. 이 영화들에서 대통령은 현실에 눈 감거나(<판도라>) 악의 중심에 서 있다(<내부자들>).


<판도라>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10여 년 전 한국영화 속 대통령은 전혀 달랐다. 당시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안성기였는데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고 딸을 위해 숙제를 대신해주는 가족적인 대통령이었고, <한반도>(2006)에선 남북통일을 위해 일본과 대적하는 자신감 넘치는 대통령이었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


또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에는 이순재, 장동건, 고두심이 모두 대통령으로 나와 성공적인 정권교체를 보여주는데 이순재는 로또를 맞춰보는 서민 대통령, 장동건은 자주 국방을 실천하는 꽃미남 싱글 대통령, 고두심은 남편 때문에 고민이 많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도 그럭저럭 잘 됐다. 만약 누군가 지금 이런 대통령을 영화에 등장시키려 한다면 비현실적이라며 기획 단계부터 퇴짜를 맞을지도 모르지만 한때 한국영화에 이런 대통령들이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굿모닝 프레지던트>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세상은 변한다. 어둠이 걷히면서 권력을 사유화한 자들의 민낯이 까발려지고 있다. 현실과 너무 닮았던 영화 속 대통령, 또는 영화보다 더 보잘 것 없었던 현실의 대통령은 점차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있다. 혹독한 겨울의 끝은 언제나 봄이다.


마침 올 봄은 대선의 계절이기도 하다. 정치권은 조기 대선이 이뤄질 가능성을 높게 보고 이른 대선 레이스를 시작했다. 최악의 대통령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후보 검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세상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화 속 대통령은 다시 예전처럼 관객을 웃게 할 수 있을까?


유력 대선 후보들이 바쁜 와중에도 종종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가 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뉴스가 되고, 그들이 고른 영화는 고도의 정치 행보로 해석된다. 그들에게 영화란 단지 여가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 이상으로 영화 선택 자체가 유권자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행위다. 정치인의 숙명이라고 할까. 그들도 이런 메커니즘을 충분히 알 것이다.


최근 대선 후보들은 어떤 영화를 골랐을까? 그들이 봤다고 뉴스에 소개된 영화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들을 통해 대선 후보들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해석해 보자. 앞으로 정치는 블랙리스트와 단절하고 영화와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대선 후보들이 선택한 영화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최근 관람한 영화는 <재심>이다. 이 영화는 지난 2000년 전북 익산 약촌 오거리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살인사건에 픽션을 가미해 재구성한 드라마다. 경찰과 검찰이 아무 증거도 없이 목격자를 살인자로 만들어버리고 유력한 용의자는 풀어준 이 어이없는 사건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알려지며 시민들의 큰 공분을 샀다. 영화 역시 2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성공했고,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끝까지 추적한 박준영 변호사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문재인 전 대표와 박준영 변호사


문 전 대표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박준영 변호사와의 인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약촌 오거리 사건처럼 경찰이 범인을 조작한 1990년 엄궁동 2인조 사건의 재심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 사건의 원심 변호사가 문 전 대표였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과 더불어 그가 <재심>을 관람한 이유에는 이처럼 경찰, 검찰, 법원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직접 경험해본 자신이 누구보다 사법개혁의 적임자임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문 전 대표는 작년 말엔 <판도라>를 보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박정우 감독과 함께 간담회도 가졌다.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로 대한민국이 아수라장이 되는 상황을 가정한 재난영화다. 관객 458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 성공했다.


<판도라> 시사회의 문재인 전 대표


영화는 스펙터클과 메시지로 관객에게 원전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간담회에서 감독은 이 영화의 모델이 고리 1호기라고 밝히며 만약 사고가 터지면 부산, 울산, 양산의 시민 340만 명이 고통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 전 대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영화의 메시지처럼 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는 2012년 대선 때도 ‘탈 원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최근 경주에 지진이 잇달아 발생했을 땐 노후화된 월성원전 1호기를 즉각 폐쇄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공약을 상기시킨 것이다.


둘째, 현 정권과의 대비를 통한 존재감 부각이다. 영화 속 우왕좌왕하는 대통령은 세월호 당시 무능했던 정부를 연상시킨다. 그는 영화 감상 소감으로 “국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차별화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제작진과 안희정 지사


안희정 충남지사가 최근 본 영화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1995년 부산시장에 출마할 때의 모습과 2016년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아 여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백무현 후보를 비교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새로운 사실보다는 추억과 회고담이 주된 내용이다.


안 지사는 이 영화를 본 뒤 "내 30대 인생을 다 바쳤던, 그토록 닮고 배우고 싶었던 노무현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며 “나는 지금 노무현처럼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감상문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국 정치에서 노무현은 두 개의 산이다. 공과가 분명한 유산이면서 동시에 넘어야 할 고산이기도 하다. 안 지사는 최근 대통합 발언을 통해 보수진영의 지지율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 <무현, 두 도시 이야기> 관람처럼 친노 적자인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자신의 고정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려는 메시지를 보내는 측면이 강하다.


이재명 시장과 도올 김용옥


이재명 성남시장이 최근 관람한 영화는 <나의 살던 고향은>과 <자백>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도올 김용옥이 중국의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도올의 중국 일기]를 류종헌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로 도올이 직접 출연해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며 한반도의 역사 복원을 이야기한다.


<자백>은 뉴스타파의 최승호 PD가 무죄를 선고받은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의 이면을 파헤친 다큐멘터리로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수없이 자행된 간첩조작이 현 정권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반복되는 배후에 김기춘 등 공안검사 출신 권력자가 있다고 꼬집는다.


두 영화의 메시지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관람을 통해 이 시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개성공단 폐쇄 등 북한과 대립각을 세워온 현 정권을 비판하고, 간첩조작을 만든 종북몰이는 정치권에서도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논란이 일 때마다 사이다 같은 발언으로 정면 돌파를 택해온 그는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종북 논란 올가미를 벗기는데 이 영화를 활용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언급한 안철수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최근 영국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감상했다. 이 영화는 심근경색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인이 국가 실업 보호망의 사각지대에서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는 과정을 그린다.


안 전 대표는 영화를 본 뒤 “국민의 생명, 시민의 권리, 사람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기본소명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된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개봉한지 한참 지난 이 영화를 뒤늦게 선택한 이유는 대선의 화두로 부상할 복지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주인공이 ‘자존심’을 힘주어 말했을 때 행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환호는 천만 촛불이 보여준 희망의 불빛과 다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촛불 민심의 대변자가 사실은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답보 상태에 있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복안인 셈이다.


안 전 대표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평화로운 행성에 커다란 파도가 덮쳐오는 장면을 인용하며 "우리 미래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그는 IT 사업가였던 자신의 경력을 장점으로 부각시키는데 영화를 이용하기도 한다.



영화가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정치와 영화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사실은 꽤 가깝다. 정치인은 종종 극장에 간다. 유권자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가서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오뎅을 사먹는 것처럼 극장에서 취향에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이 영화를 본다. 화제가 된 흥행작을 보기도 하고 자신과 뜻이 맞는 영화를 맞춤관람하기도 한다. 자신의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데 가장 대중적인 문화인 영화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본의 아니게 정치인의 스피커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치는 영화를 망치려고 했다. 찍어 누르고, 간섭하고, 차별해 깊은 상처를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현실 고발 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하며 정치에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사라지고 권력에 눈먼 무능한 대통령이 스크린에서 관객의 야유를 받아왔다. 오죽하면 영화 <더 킹>에서 조인성이 연기한 박태수는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유가 복수하기 위해서라고까지 말했다. 정치에 복수하고 싶어 하는 영화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대사였다.


<더 킹>


이제 다시 대선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가 영화를 바꾼 것처럼 영화도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필자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보다는 영화가 더 유권자의 편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영화는 관객이 먼저 알아보고 퇴출시켜왔기 때문이다. 그 관객이 곧 유권자다. 유권자 앞에 선 정치인 역시 개봉을 앞둔 영화감독처럼 항상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나빠지는 것을 본 다음에는 꼭 세상이 나빠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난 세월 세상이 나빠지는 것을 목도했지만 다행히 영화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제 세상이 좋아질 차례다. 송강호의 말처럼 어쩌면 영화는 이미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 이 글은 [BBB] 3월호에 기고한 글의 풀 버전입니다.

** 각 사진들의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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