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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회를 맞은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는 총 9편이다. 2010년부터 아카데미는 그전까지 5편을 후보에 올리던 관행을 깨고 8~10편을 작품상 후보로 올리고 있다.


2월 26일(현지 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릴 시상식을 앞두고 9편을 모두 소개한다. 올해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소재와 장르가 다양해 2016년 미국영화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작품들 속에 소외된 인물이 등장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트럼프 시대 미국사회의 변화와 직접 맞닿아 있는 작품도 꽤 있다.


영화에 매긴 별점은 필자의 개인적인 평가이며 영화 순서는 필자가 생각하는 9편의 순위임을 밝혀둔다.



문라이트 ★★★★☆ 푸른 달빛 아래 영화로 쓴 시


‘푸른 달빛 아래 흑인 소년은 푸르게 보이네.’ 이 시적인 문장을 스크린으로 옮기면 이 영화가 된다. 마이애미에서 마약, 범죄에 노출돼 살아가는 동성애자 흑인 남자의 소년기, 청소년기, 성년기를 챕터별로 담았다. 부서질 듯 유약하고 말이 없던 소년은 근육질 남자로 커가지만 상처받기 쉬운 그의 내면은 그대로다. 그의 성장기를 지탱해준 것은 사랑이었음을 확인하는 엔딩은 뭉클하다. 섬세하고, 사려깊고, 낯설지만 불편하지 않고, 무엇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장담이다. ‘공감각적 심상’이 담긴 싯구처럼 오감으로 받아들일 촉수가 필요한 영화.



라라랜드 ★★★★☆ 영화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정통 재즈 클럽을 열고 싶은 뮤지션과 오디션만 수백번째인 배우 지망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노래하고 춤추며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동안 두 개의 열정적인 꿈은 점점 실현 가능한 목표로 변해간다. 시간이 흘러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꿈과 사랑, 둘 중 하나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와 음악 창작을 꿈꿔봤던 지망생들에겐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올 스토리. 고전 뮤지컬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롱테이크 위주로 펼쳐지는 뮤지컬 장면들이 황홀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예고없이 찾아온 고통.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형의 부고를 듣고 보스턴 북동쪽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찾아간 남자는 형이 그에게 10대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는 유언장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몇 년 전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뒤 삶에서 도망쳐 근근히 버텨가던 상태였다. 조카와 티격태격하며 장례식을 준비하던 남자는 잊고 싶어했던 과거와 마주친다. 영화는 잔잔하지만 에피소드가 풍부해 군데군데 유머러스한 장면도 꽤 많다. 인생이 끝난 듯 커다란 고통 속에 사는 사람에겐 매일 비가 내려야 할 것 같지만 세상은 그를 위해 따로 울어주지 않는다. 그가 도망쳤던 해안가 마을 역시 변함없이 그대로다. 배우들의 열연과 과감한 음악의 사용으로 인해 몰입감이 뛰어난 드라마.




컨택트 ★★★★ 낯설지만 세련된, 그리스 신화 같은 SF


외계에서 온 거대한 반구형 비행체 12개가 지구상에 나타난다. 세계의 리더가 된 중국은 이들과 전쟁을 벌이려 하지만 미국의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외계인과 의사소통해 이들이 지구에 온 의도를 알아내려 한다. 도식적인 국제관계보다는 언어학자가 외계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여기에 맞물린 독특한 스토리 구조가 신선한 작품이다. 영화화하기 불가능할 거라고 여겨졌던 저명한 원작소설만큼 난해하지만 집중력 있는 사운드는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새로운 우주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분들에게 추천.



로스트 인 더스트 ★★★★ 폼나고 우아한 액션 뒤 처절한 삶


은행에 저당잡힌 집을 되찾기 위해 허름한 동네 은행들을 터는 텍사스의 용감한 형제들. 이들을 쫓는 보안관은 은퇴를 앞두고 느릿느릿 그러나 폼나게 추격전을 벌인다. 모양새는 서부극이지만 마을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고 곳곳엔 급전대출 광고 간판만이 나부끼고 있다. 금융위기 시대 주민들은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범죄로부터 마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사명감만큼은 남다르다. 총기 소유를 고집하는 미국 보수의 근원을 알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히든 피겨스 ★★★☆ 숨겨진 세 영웅을 따뜻하게 비추다


‘컴퓨터’라는 단어는 당초 복잡한 계산을 담당하던 흑인 여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영화는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비행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궤도를 계산하던 수학 천재 흑인 여성들을 재조명한 휴먼 드라마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과학기술계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 세 명의 성공담이 가슴뭉클한 희망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이공계에서 성공을 꿈꾸는 여성 혹은 자신이 유리천장에 맞서는 언더독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보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영화. 작년 말 미국 개봉 당시 미셸 오바마가 적극 추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이언 ★★★☆ 기적의 환희를 눈부시게 포착하다


다섯 살 때 인도의 한 기차역에서 길을 잃은 소년이 호주로 입양된 뒤 25년만에 고향을 찾아온다. 호주에서 남들과 다른 정체성을 고민하던 청년이 어릴 적 살던 곳을 기억해낸 비결은 구글어스였다. 2013년 국제뉴스가 될 정도로 화제였던 사건을 실제 인물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감동 실화. 따뜻한 인도와 차가운 호주의 영상 대비와 심도 깊은 화면 구성, 감각적인 음악이 단순한 스토리의 이 영화에 더 몰입하도록 만들어준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살짝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오르게도 하는 영화. 단, 해외 입양에 대한 시각은 다분히 서양중심적이다.



펜시즈 ★★★☆ 수다쟁이 덴젤 워싱턴 커리어의 정점


1950년대 피츠버그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흑인 남자는 어릴적 인종차별로 인해 야구선수가 될 수 없었기에 아들만큼은 제대로 된 축구선수로 만들고 싶어 한다. 집에 펜스를 치는 모습은 고립무원 속에서의 투쟁을 상징한다. 쉴새없이 대사를 쏟아내는 인물들 속에서 당시 흑인 가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연극형 드라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흑인 버전이라 불린, 퓰리처상을 받은 연극이 원작이다. 덴젤 워싱턴은 연극으로 이미 토니상을 받은 적 있을 만큼 이 역할에 통달했고 그래서 직접 연출까지 맡았다. 눈앞에서 연극을 보는 듯 실감나는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다.



핵소 고지 ★★★ 전쟁영화도 종교영화처럼 만든 멜 깁슨의 뚝심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해 전쟁영웅이 된 미군 의무병의 실화를 담은 전쟁영화. 주인공은 어릴 적부터 가져온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 집총을 거부하지만 동료들의 편견에도 아랑곳 않고 핵소 고지 전투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멜 깁슨이 10년 만에 감독한 작품으로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그의 성향이 영화에 절절히 묻어난다. 트럼프 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 신념과도 궁합이 잘 맞아 미국판 ‘국뽕’ 영화로 볼 여지도 있다. 전투 장면만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견될 정도로 실감난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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