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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정유정이라는 이름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7년의 밤]이 두번째 작품이라니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인터넷 서점의 네티즌 서평이 칭찬 일색이길래 한번 낚여볼까 하는 심정으로 구매 버튼을 눌렀죠.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책을 집었습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읽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그 이후로 이것저것 일이 바빠서 책을 읽는데 며칠이 걸리긴 했지만 머리속에는 세령호와 등대마을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시간이 넉넉히 있었다면 하루 만에 다 읽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책은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령호라는 가상의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전직 야구선수 출신인 한 남자가 한 아이를 차로 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이후 일어나는 복수와 그 복수를 막기 위한 또다른 복수. 책을 읽는 내내 스티븐 킹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미국 작가들의 소설이 떠올랐는데 확실히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기존의 한국식 소설보다는 영미식 스릴러의 전통에 가깝습니다.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그 죄책감에 악몽을 꾸는 덩치만 큰 전직 야구선수 최현수, 아내와 딸을 교정(?) 해주겠다며 가정폭력을 휘두르다가 딸이 죽자 집요하게 범인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는 오영제, 최현수의 아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를 보호해주는 소설가 안승환,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자 복수극의 중심에 놓이게 된 최현수의 아들 최서원. 책의 1/3 가량이 이들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은 세령호라는 호수 그 자체입니다. 짙은 안개가 자주 껴서 CCTV가 무용지물인 이 호수는 그 음침한 분위기로 이야기 전체를 지배합니다. 호수는 현수의 차 사고가 벌어지는 다리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잠수를 해왔던 승환이 마침 그 시간에 잠수하며 사건을 목격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치 윤태영의 [이끼]에서 고립된 마을이 모든 사건의 열쇠이자 자물쇠 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고립된 장소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샤이닝] 같은 스티븐 킹의 작품들에 자주 나오는 방식이기도 하죠.



애초에 작가의 이름을 보지 않았다면 이 소설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남자들이 이끌어가는 아주 거친 이야기에 야구와 잠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녹아 있는 소설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부성애나 아이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을 보면 섬세함이 묻어있기도 합니다.

최근 이 소설의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하는군요. 어떤 영화가 나올지 기대됩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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