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국 노동전문 변호사가 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라는 책을 읽고나서 그동안 미국과 유럽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미국식 모델이 좋은지 유럽식 모델이 좋은지 - 이것은 내가 대학생 때부터 고민해오던 것인데 사실 이론으로만 이해했지 실제로 미국 사람과 유럽 사람에게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서 실제 생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20대에 일주일간 다녀온 파리와 30여년 후 독일에서 몇 달간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미국에서의 삶과 확 다른 유럽에서의 삶을 비교하고 있는데 요지는 이렇다. 미국인들은 1년 내내 1800시간 넘게 일을 하지만 소득은 1400시간을 일하는 유럽인들보다 조금 많은 정도이다. 유럽인들은 6주간의 휴가를 가고, 노동조합이 고용을 보장해주며, 사회연금을 받고, 무상교육과 의료가 정착되어 있지만 미국인들은 휴가도 없이 일만 하고, 그나마도 해고의 불안함에 떨어야 하고, 아파도 의료보험이 없으면 병원은 꿈도 못꾸고, 아이들을 공립학교에서 망치지 않기 위해 자꾸만 등록금이 오르는 사립학교에 보내야 한다.

미국의 주요 뉴스에서는 유럽이 망해가고 있다고 세뇌시키지만 실제로 가보면 미국보다도 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미국이 1명의 빌게이츠와 6명의 하층민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유럽은 7명의 엇비슷한 부르주아(중산층)들로 이루어진 사회다. 유럽엔 500달러 이상 돈을 내고 식사를 하는 부자들은 별로 없지만 5달러가 없어서 벌벌 떠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렇게 말하면 미국의 많은 보수언론들은 득달같이 달려들며 세금폭탄 운운할 테지만 실제로 미국인과 유럽인이 내는 세금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은 대략 소득의 40%를 세금으로 내는 반면 유럽인들은 소득의 48% 정도를 세금으로 낸다. 하지만 8%P의 세금 차이에 비해서 그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은 천양지차다.

결론은 유럽식 모델에서 세금은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서비스(예컨대 의료, 교육, 전기, 가스 등등)에 쓰여지는 반면 미국식 모델에서 세금은 민간 기업으로 간다. 그 민간 기업들의 주주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이를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뻥튀기하는 월스트리스를 배불리는데 쓰인다. 결국 1%의 부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살기가 더 편하다.

이 책은 미국인 변호사가 썼지만 읽으면서 답답했던 것은 미국의 상황이 한국과 참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그동안 미국식 모델만을 추종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미FTA를 밀어부치는 이 정부에서 보듯이 이대로 간다면 현재 금융위기로 곪아터진 미국이 향후 미래 한국의 모습이 될 것이 너무나 자명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처럼 경쟁 위주의 미국식 모델을 흡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점차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 명의 슈퍼스타를 키워내고 나머지는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사회보장망 속에서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꿈일까? 해답을 찾기 전에 한국사회가 미국식을 추종하는 원인을 생각해보자.


한국이 미국식 모델을 따르게 된 원인은 미국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분야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미국 유학을 갔다와야 하는 것은 잘 알려진 현실이다. 심지어 영국의 옥스포드나 캠브리지보다 미국의 3류 대학이 더 인정받기도 한다. 그 이유는 한국 기업들이 대부분 유럽보다는 미국과 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경쟁을 강조하는 미국식 교육이 적자생존의 기업문화에 더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식 MBA에서는 CEO를 키우기 위해 다양한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데 대부분은 미국 기업이다. 항상 유연한 노동정책과 규제완화를 부르짖으며 이를 통한 비용절감을 성과로 포장하는 이들에게는 미국식 모델이 성공의 지름길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1960~70년대 부모 세대들이 힘들게 일해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더니 그들이 미국에서 배워온 것이 이런 시장자유의 미국식 모델이며 이제는 한국에서 주요 자리를 꿰차고 앉아 한국을 미국처럼 시장만능 국가로 바꾸려 하고 있다.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탄했듯이 관료들이나 기업인들 중에 미국식 모델을 추종하는 세력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도가 지나쳐서 미국식 모델을 수입하는 것이 한국에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미FTA 협상을 주도한 김현종이나 김종훈 같은 통상관료들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서도 밝혀졌듯이 그들의 기준은 서울이 아니라 워싱턴이고 서울을 워싱턴에 맞추기 위해 한국 정부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또 미국식 모델을 추종하는 한국 재벌 대기업들은 미국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식 모델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1800시간 일하는 사람들에 맞서 후발주자로서 경쟁하기 위해 230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거의 모두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대기업의 오너와 경영진들은 한국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재벌들의 힘을 바탕으로 언론과 정관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미국식 모델을 밀어부치고 있다. 그래서 조중동과 각종 경제신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매체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논조를 성경처럼 믿고 재생산하고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교육시킨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식 모델이 아니어도 잘 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북유럽이나 중국의 기업들을 보라. 아니, 어쩌면 장하준의 주장대로 미국식 모델은 오히려 기업 성장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과거 한국의 대기업 성공신화가 정부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듯이 말이다.



한국사회는 너무 미국에 집착하고 있다. 100여년 전 조선이 개화기를 맞은 이후 비자발적으로 시작된 미국과의 인연이 한국전쟁으로 깊어지더니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가 부흥하며 유일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내에서 미국식 모델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식 성장모델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융을 중심으로 한 성장은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극심한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미국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중이다. 달러화의 몰락과 함께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반면 유럽은 어떤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같은 남부 유럽은 몰락하고 있지만 이들이 몰락하는 것은 복지 때문이 아니라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다. (그리스는 뇌물이 없으면 일을 처리하기 힘들고 이탈리아는 정권에 유착한 언론으로 인해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나라 모두 아테네와 로마 시대 세계를 호령한 이후 전성기를 회복한 적이 없다.) 반면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복지 천국들을 보라. 그들은 금융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성장하고 있다. 복지가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전제는 이미 틀렸음이 증명됐다. 이젠 미국식 모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때다.


미국과 유럽의 차이는 우리 일상의 제품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제품들은 대개 조악하고 투박한 반면 유럽 제품은 비교적 정교하고 세련됐고 또 오래간다. 즉흥적으로 머리 속에 아무거나 떠올려보라. 프랑스의 향수, 스위스의 시계, 독일의 자동차, 스웨덴의 가구 등등. 유럽에 고부가가치 제조업이 발달한 원인을 안정적인 노동 환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보장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안심하고 100년 넘게 가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 아닐까?

미국식 시장경쟁 사회와 유럽식 복지 사회. 두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고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럽식 모델을 고를 것이다.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내겠지만 그로 인해 더 풍요로운 공공서비스 혜택을 누릴 수 있고, 노후 걱정을 안해도 된다면 그 세금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한미FTA를 밀어부치려는 대기업들을 따라 미국식 모델을 계속해서 추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처럼 복지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전환할 것인가. 나는 사람들이 두 가지 모델의 차이점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보일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