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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기에 빅 아이즈는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앤디 워홀의 이 말은 이상하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면 빅 아이즈는 훌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위선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빅 아이즈의 성공 신화가 그렇다. 그림을 그린 마가렛은 싱글맘으로 당시 195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제한되어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였다. 마가렛은 월터 킨을 만나 사랑에 빠져 재혼했고 월터는 마가렛의 그림을 팔았다. 특유의 입담으로 사람들을 구슬렸다. 그리는 것만큼 분명히 파는 것도 재능이다. 그런데 그 입담이 너무 과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속여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빅 아이즈는 월터 킨의 작품이 됐다. 무려 10년 동안.




“내 작품의 영감 원천인 빅 아이즈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팀 버튼의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술계 최대 스캔들 중 하나인 ‘빅 아이즈’를 둘러싼 진실 공방은 킨 부부의 10년 간의 결혼생활이 1965년 이혼으로 막을 내린 뒤 1970년 마가렛이 자신이 빅 아이즈를 그렸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공방이 이어지다 1986년 마가렛이 남편을 고소해 법정에서 마가렛이 진짜 화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법정에서 두 사람은 1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받았고, 마가렛은 52분 만에 빅 아이즈를 완성한 반면 월터는 어깨 통증을 이유로 이 제안을 거부한다. 배심원은 그녀가 4백만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고 판결했다.


팀 버튼이 빅 아이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초기작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스테인보이> <빈센트> 등 그의 캐릭터들은 줄곧 큰 눈을 갖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는 캐스팅 과정에서도 이왕이면 눈이 큰 배우를 선호해왔다고 한다. 그가 빅 아이즈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빅 아이즈가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는 팝아트의 태동기로 팝아트는 미술관 전시를 거부하고 스스로 복제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일즈맨 월터는 특유의 판매 수완으로 빅 아이즈 그림을 포스터, 엽서 등으로 인쇄했고 큰 돈을 벌었다. 당시에 뉴욕타임즈 등 전통적인 매체가 이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현재도 빅 아이즈는 키치아트의 시초로 남아 있다. 빅 아이즈를 실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각본가인 스콧 알렉산더와 래리 카라스제우스키는 무려 10년 동안 구상해 시나리오로 옮겼다.




<빅 아이즈>는 기존 팀 버튼 영화와 많이 다르다.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사라진 자리에 부부 사이의 갈등 이야기가 남았다. 감독 이름을 지우고 본다면 팀 버튼 영화임을 알 수 있는 장치가 거의 없다. 차라리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의 가벼운 버전에 가깝다고 할까? 다행히 에이미 애덤스와 크리스토프 왈츠가 맛깔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을 덜어준다. <빅 아이즈>에서 눈이 큰 아이의 모델이 된 마가렛의 딸은 시종일관 시큰둥하기만 하다. 기존의 팀 버튼이었다면 분명히 눈이 큰 아이를 좀더 입체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박목월에게 '눈이 큰 아이'는 설렘의 대상이었는데 팀 버튼에게 눈이 큰 아이는 마가렛의 창조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법정 드라마에 치중하느라 실제 '빅 아이즈'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영화가 못내 아쉽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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